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 50
전쟁 피해 조사로부터
소장품 관리체계 정비로
글.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첫 번째 이야기

1963년 5월 국립박물관은 6·25전쟁 피해 소장품 실태 조사를 바탕으로 서울 본관의 소장품목록(『국립박물관소장품목록』 제1책)을 펴냈다.도1 여러 악조건을 뚫고 휴전 후 10년 만에 어렵사리 얻은 성과였다. 국립박물관은 인력과 예산 그리고 수장 공간의 부족에 늘 시달렸다. 소장품 관리는 박물관의 최우선 사업으로 꼽히지만, 실상은 다른 경우가 많다.
여기에만 몰두하고 전시 등의 다른 사업을 제쳐둔다면, 사회 속에서 박물관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은 전쟁 피해 내역을 정리해야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품 관리의 문제점도 개선해야 했다.

도 1. 『국립박물관본관소장품목록』 표지(1963)
총괄표
일러두기 :
1. 이 목록은 1963년 5월말 현재로 본 국립박물관 본관이 소장한 유물 목록이며 6·25 전재 戰災 로 인하여 망실 亡失 된 유물은 제외되어 있다.
1. 본 목록 작성에 있어서는 8·15 이후 신수품新收品과 접수품接收品 , 구민속박물관旧民俗博物館*(南山分館) 및 개성분관開城分館 소장품을 구분하였는데 그것은 유물번호와 대장이 각기 구분되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1. 이들 소장품은 다시 그 종류에 따라 금속제품, 옥석玉石 , 토도土陶 , 골각骨角 및 패각貝殼, 목죽초칠木竹草漆 피모지직皮毛紙織, 서화탁본書畵拓本, 무구武具, 기타로 크게 나누어 관계 유물의 색출에 편리하게 하였다.
1. 소장품 명칭에 대하여서는 일정日政 때부터 사용해온 대장 기재 명칭을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우리말로서는 적합지 못한 것이 많아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이며 앞으로 정리가 끝나는 대로 보다 완전한 목록을 작성 인쇄할 예정이다.

1963년 5월 국립박물관
*민족박물관의 오기誤記(필자)

국립박물관의 의지에 더해 국회와 문교부의 감사도 사업의 동력이 되었다. 앞서 살핀 대로 휴전 이듬해인 1954년 10월에 처음 소장품 관리에 대한 국회의 감사가 진행되었고,01 이후 지속된 국회와 문교부의 감사는 소장품 관리 기능 정상화를 재촉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국립박물관의 물리적 전신인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소장품 관리의 기본 자료로 장부 형식의 진열품대장과 함께 유물별 낱장 자료인 유물카드를 운용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소장품을 크게 진열품陳列品과 참고품의 두 범주로 나누었으며, 이 중 ‘진열품’은 전시실에 진열된 유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등록품이라는 개념에 가까웠다. 참고품은 발굴조사 등으로 입수한 유물 중 등록하지 않고 보관하는 미등록품이다.
국립박물관은 1945년 조선총독부박물관 접수 당시 진열품대장과 카드를 실제 유물과의 대조 작업 없이 인수했고,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유물 실사 작업을 진행하다 6·25전쟁을 맞았다.02

도2. 1954~1955년의 국회감사에 따라 작성된 『국립박물관소장품조사목록』(1955) 표지 및 내지
[사진 출처: 아트뱅크 누리집 http://oldbooks.co.kr]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소장품 관리는 현대 박물관의 운영 표준에 비추어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참고품이라는 수많은 미등록품의 존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또한 등록품의 경우에도 대개 카드에 소장품 사진을 찍어 첨부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물에 등록번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거나 탈락될 경우, 해당 유물과 관련 정보를 맞출 수 없게 되는 큰문제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유물이 멸실되었을 때 실제 모습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치명적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6·25전쟁 때 멸실된 많은 양의 유물은 대장과 카드에 이름과 크기, 짧은 설명문만이 남았을 뿐 그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대개의 경우 촬영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지 못한 채 국립박물관은 큰 전쟁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수습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54년부터 이듬해까지 진행된 국회의 감사는 전쟁 피해 조사와 소장품 관리 정상화에 상당한 기간과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시켰다.03

도 3. 유물카드 보관장이 있는 국립박물관 미술과 사무실(1960년대) 모습과 현존하는 유물카드 보관장(오른쪽)
이준구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제공 사진

도2 본격적인 전쟁 피해 조사가 시작된 것은 <한국국보전> 미국 순회 전시가 종료된 1959년 3월부터였다. 이 시점 이전까지는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진열품대장의 정비가 이루어졌고,04 이어서 전쟁 당시 부산에 소개된 이래 서울로 돌아오지 못한 유물을 대장과 대조하는 작업도2 정도가 진행될 수 있었다.05
협소한 석조전 수장고로 옮기지 못한 채 경복궁의 수장 시설에 그대로 남아 있던 소장품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촉탁 신분으로 조사에 참여한 전 국립경주박물관 이난영 관장은 “내가 박물관에 들어갔을 때 동란 시의 망실 유물에 대한 국회에서의 추궁이 심해 경복궁에 가서 실물 조사를 실시했다.
경복궁 갈 때는 경무대景武臺 에 사전 통보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매일 경복궁 창고 앞에 모여 만춘전萬春殿 에서 훼손산일毁損散逸 된유물 중심으로 천자고天字庫 , 지자고地字庫 등근정전이나 사정전 思政殿 과 만춘전 등의 회랑에 있던 창고의 흐트러진 유물들을 점검했다”고 회고했다.06
이처럼 1959년부터 경복궁 창고 안에 남아 있는 유물에 대한 점검이 진행되어 같은 해 9월 말에는 등록번호가 기재된 유물의 정리와 대장 조회 작업이 종료되었다.07 1960년부터 1961년까지는 경복궁 창고에 있던 고분 출토품등 기타 유물을 국립박물관의 지하 창고로 옮겨 점검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1961년 9월까지는 등록번호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에 대한 점검을 마치고 격납 위치도 모두 파악했다. 이로써 이후부터는 진열품대장과 유물카드에 이러한 정리 결과를 기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도3및도4

도 4. <소장품 대장(본관품)>에서 6·25 망실품을 말소한 내역
『국립중앙박물관 60년』, 2006, p.85에서 옮겨 실음

이와 함께 진행된 중요한 작업이 등록번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유물에 대한 조사였다.
당시 3486점으로 집계될 만큼 그 수량은 적지 않았다. 당시의 조사자들은 이 유물을 ‘번호 탈락 유물’로 봤다. 즉 원래 유물에 기재되어 있거나 부착되어 있던 등록번호가 탈락된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립박물관은 전쟁 피해로 확인되지 않는 유물 1만595점 중 3486점(번호 탈락 유물로 파악된 수량)은 번호를 알 수 없을 뿐 유물은 살아남은 것으로 봤다. 이렇게 되면 실제 망실 유물은 7109점이 되는 셈이다.08
하지만 이 판단은 이난영 전 관장이 언급한 대로 ‘성급한’ 것이었다.09
당시 번호가 탈락된 유물이라고 봤던 대부분의 유물은 실제로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등록작업을 진행하지 않은 미등록품이었다.
오늘날에도 그 입수 연유나 맥락을 알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만큼, 당시에 그 사정을 알기는 어려웠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접수 시 분명한 인계인수 과정이 없었던 탓으로 보인다.10 조사 당시 국립박물관은 이들 유물에 ‘M’자 코드를 부여하고 일련번호를 붙여 대장을 작성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사실상 정식 소장품 등록 코드로 운용되고 있다.
결국 조선총독부박물관 이래의 등록품과 참고품 그리고 별도의 미등록품 등이 혼재된 데다 전쟁 피해까지 입은 소장품을 1950년 후반의 여건에서 완벽하게 정리해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망실되었다고 판단했던 유물이 미등록품 사이에서 새로 확인되는 경우가 이어졌고, 완전한 정리와 파악은 용산 새 박물관 이전을 위한 전체 소장품 실사 작업과 일제강점기 미등록품 등록 작업이 끝난 2000년대까지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기는 했지만 국립박물관은 전쟁 피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장 및 카드 기재 작업을 1962년 4월 25일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어서 1963년 5월 31일자로 서울 본관의 소장품목록 출간과 망실 유물 대장도4 의 작성을 마무리함으로써 전쟁 피해 조사를 일단락했다.

01 장상훈, “덕수궁시대의 개막과 관시의 제정”, 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 제26호, 『박물관신문』 제582호, 2020.2., pp.28-29.
02 국립박물관, 『관보』 5, 1948, p.8.
03 위의 글.
04 국립박물관, “감사결과 처분 요구” 1963.8.13. 이 중 6만여 점이나 되는 국립박물관 소장품 전체에 대한 유물카드를 네 벌 작성했다는 기록은 현존 자료로는 확인하기 어려워 사실 여부는 향후 확인을 요한다.
05 위의 글.
06 이난영, 『박물관 창고지기』, 통천출판사, 2005, pp.21~22.
07 국립박물관, 앞의 글.
08 위의 글.
09 이난영, 위의 글.
10 조선총독부박물관 주임이던 아리미쓰 교이치와 국립박물관의 왕래가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재개된 점을 생각하면, 이 부분에 대한 정보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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