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 51
전쟁 피해 조사로부터
소장품 관리체계 정비로
글.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두 번째 이야기

1950년대 후반 국립박물관에서 전쟁 피해 조사 업무를 수행한 부서는 보급과普及課(과장 최순우)였다. 1949년 12월의 직제 개편01으로 생겨난 보급과는 1961년 7월의 폐지 시점까지 1945년 개관 시점부터 진열과陳列課가 담당하던 “진열품의 획득과 기탁, 소장품의 배치, 진열, 보관” 등 소장품 관리와 전시 업무에 더해 사회교육 업무를 담당했다.
6.25 전쟁 기간 중 진열과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보급과가 진열과가 담당하던 업무를 모두 맡아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진열’이라는 개념이 ‘보급’이라는 좀 더 포괄적인 개념에 포함된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보급이라는 용어에는 전시나 교육으로 학예 콘텐츠를 ‘계몽’ 및 ‘선전’한다는 어감이 들어 있었다.
요컨대 1949년 12월의 직제 개편으로 총무, 연구, 진열, 보급의 4과 체제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진열과가 보급과로 이름을 바꾼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주로 고고학적 조사 연구를 담당했던 연구과 소관 업무 이외의 대부분의 학예 업무는 보급과의 과업이 되었던 것이다.
1955년 2월 국정감사에 대비해 작성된 <국립박물관 현황 조사보고서>에는 보급과의 업무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먼저 진열품의 수집, 수탁, 소장품의 배치 및 진열을 비롯하여, 진열품 대장과 카드의 정리, 소장품의 보관·보수 등 소장품 관리 업무에 더해, 전시품의 해설에 대한 저술, 강당 운영, 특별전시, 사회교육 등의 업무를 함께 담당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보급과는 전시, 소장품 관리, 교육의 세 업무를 모두 담당했던 것이다.02
1961년 1월 국립박물관 직제의 개편으로 관리과·고고과·미술과의 3과 체제가 출범하면서, “소장품의 관리·보관 및 구입” 업무는 서무과의 후신인 관리과의 담당 사무가 되었다.03 이에 따라 보급과에서 소장품을 관리하던 촉탁직 인력이 관리과로 배치되었다.04 학예 영역에 속해 있어야 할 소장품 관리 업무가 국유재산 관리라는 명분으로 관리과에 배정된 배경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전쟁 피해 조사 과정에서 소장품 관리 업무가 품은 많이 들고 져야 할 책임이 많다는 점은 분명해졌고, 이러한 업무를 학예 영역으로부터 밀어내려는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05 또한 연구나 전시 업무에 비해 평가가 박해서 잘 해야 본전이었을 소장품 관리 업무는 학예 업무의 본령으로 간주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소장품 관리를 담당하게 된 관리과로 옮겨간 학예직은 없었다.06
당시 국립박물관에서 촉탁직으로 근무했던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의 회고에 따르면, 전쟁 피해 문화재의 망실亡失 처리를 둘러싼 갈등이 소장품 관리 업무를 기피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소장품 관리 업무가 관리과로 옮겨진 것도 그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관리과에서 소장품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 자체가 또 학예직으로 하여금 소장품 업무를 기피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07 그러나 당시 근무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인력의 절대 부족 상황 때문에 소속 부서에 관계없이 학예인력은 전쟁 피해 조사 및 소장품 정리 작업에 동원되었던 것도 사실이다.08 01 “제19조 보급과는 박물관 사업에 대한 계몽과 선전에 관한 사항을 분장한다”, <국립박물관직제>(대통령령 제234호), 1949년 12월 12일 시행. 02 국립박물관, <국립박물관 현황 조사보고서>, 1955.2. 하지만 이러한 방대한 업무를 담당해야 할 보급과에는 1955년 2월 당시 최순우 과장과 임시직원 이준구가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03 <국립박물관직제>(국무원령 제185호), 1961.1.16. 시행. 04 1961년 1월에 작성된 <국립박물관현황>에 관리과 소속 촉탁직으로 기록된 3인(이준구·홍빈기·김옥자)은 1962년 5월에 작성된 <국립박물관 현황>에는 서기書記의 직급으로 기록되어 있다. 05 이난영, 『박물관 창고지기』, 2005, pp.21~22 참고. 06 국립박물관, <국립박물관 현황>, 1961.1. 및 국립박물관, <국립박물관 현황>, 1961.5. 07 이난영, 『박물관 창고지기』, 2005, pp.21~22. 08 한국고고학회 편, 『일곱 원로에게 듣는 학국 고고학』, 2008, p.89.

도 1. 1960년대 국립박물관 미술과 사무실. 왼쪽부터 이준구, 김정주(金正柱, 재일 역사가), 최순우 미술과장, 이난영 학예관 이준구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제공

한편 1961년 1월의 직제 개편에 따라 새로 탄생한 미술과는 비로소 미술 문화재 관련 조사·연구 업무를 차차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09 또한 인력 구성 면에서 직제 개정 이전의 보급과를 계승한 미술과는 보급과장에서 미술과장이 된 최순우 학예관을 중심으로 전시 업무의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도1
1962년 10월 <한국국보전> 유럽 순회 전시를 마치고 귀국한 최순우 미술과장이 이듬해인 1963년 무려 5차례의 특별전을 개최한 것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10 한편 국립박물관은 1950년대 후반부터 새 소장품을 확보하는 일에 제한적이나마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1965년 『8·15 후 수집 진열품 도감』을 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노력이 축적된 결과였다. 앞서 살핀 대로 경주 호우총 조사 등 광복 직후부터 국립박물관이 펼친 여러 발굴조사 사업은 소장품 확보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국립박물관은 발굴조사 이외에도 구입, 수증, 교환, 발견 문화재 국가귀속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소장품을 확보해 나갔다. 국립박물관은 미군정 시기에 일본인 三啓助의 소장품이었던 맹호도(M67)를 구입했다.도2 11 국립박물관이 구입한 두 번째 문화재는 <화성원행의궤도華城園幸儀軌圖>(신수201)였다.도3 전쟁 중이었던 1952년의 구입품이었다.
구입품의 수량을 기준으로 볼 때, 문화재 구입이 본격화되는 것은 1957년부터였다.12 그런데 이 시기에 구입된 문화재는 주로 땅 속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문화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문화재 중 전시실에 바로 진열될 수 있을 정도의 중요도를 갖는 것은 적었다. 일반적인 발견 문화재에 비해 중요도와 활용도가 높은 문화재의 구입도 1960년대부터 차차 시작되었다. 09 1961년 10월에 광주의 고려 도요지에 대한 예비 조사가 진행되었다(국립박물관, <국립박물관 현황>, 1961.1 10 <이조문방목공예>, <이조백조항아리>, <이조초상화> 등 조선시대의 물질문화에 집중한 여러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다음 호에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11 김재원, 『경복궁야화』, 1991, 탐구당, p.49 및 국립박물관, 『8·15 후 수집 진열품 도감』, 1965, p.24. 12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60년사』, 2006, p.86.

도 2. 국립박물관의 첫 구입품, <맹호도>(M67)
도 3. 부산 피란 시기의 구입품, <원행정리의궤도>(신수201)

1963년의 국립박물관 업무 계획에는 소장품 확보가 단위 사업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사업 목표는 “문화재의 외국 유출을 방지하여 문화재 수호 보존에 철저를 기하기 위한 것”으로 설정되었다.13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느낌을 주는 이 목표는 예산 당국으로부터 문화재 구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여건에서는 박물관의 꾸준한 소장품 확보가 박물관의 미래를 설계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설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확한 업무 처리를 위해 관련 규정과 절차도 마련되었다. 국립박물관은 1962년 <국립박물관진열품심의회규정>(문교부령 제99호, 1962.4.4.)을 제정·공포했다.도4 14 그 목적은 “국립박물관에 진열할 진열품의 수집, 고증과 평가”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62년 5월 4일에 열린 첫 “매입품심사회”에는 당연직 위원장이 된 김재원 관장 이외에 고희동, 이병도, 이상백, 황수영 등의 외부 위원이 참석하여, 불화와 금제이식 등을 심의하고 그중 금제이식 4쌍(신수512~515)만을 구입했다.15 1962년 9월 10일에는 제2회 진열품심의를 개최하여,
청화백자(신수544~545), 백자(신수546), 청자(신수540·547), 상감청자(신수541~543,548), 철제불두(신수539), 정학교鄭鶴喬 필 죽석도竹石圖 병풍(신수538), 비암사碑巖寺 석상(신수550), 계유명삼존천불비상(신수549) 등을 심사하고 모두 구입하기로 결정했다.도5 16 이 중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은 같은 해 12월 바로 국보로 지정되었고, 비암사 석상 3점도 국보(1점: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와 보물(2점: 기축명아미타불비상 및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로 함께 지정되었다. 수준 높은 문화재를 구입하여 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는 작업이 비로소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13 국립박물관, <국립박물관 현황>, 1962.1. 14 공보부, 『관보』 호외, 1962.4.4. 15 국립박물관, “잡보”, 『미술자료』 5, 1962, p.23. 구입 문화재 옆에 필자가 부기한 등록번호는 매입 이후 같은 해에 매긴 것이다. 16 국립박물관, “잡보”, 『미술자료』 6, 1962, p.27.

도 4. 『관보』에 게재된 <국립박물관진열품심의회규정>, 1962.4.4.
도 5. 국립박물관 관장실에서 열린 진열품심사위원회 모습(1963.9.2.) 왼쪽부터 김재원 관장, 이상백 서울대 교수, 이병도 서울대 명예교수, 고희동 화백, 윤무병 고고과장
윤무병 전 충남대학교 교수 제공 사진

박물관들이 구입 이외의 소장품 확보 방법으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수증이다. 하지만 해방공간과 전쟁 기간, 그리고 그 이후의 척박한 사회 환경은 문화재 기증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1945년 개관 이래 6·25 전쟁 발발 전까지 국립박물관의 문화재 수증 사례는 단 한 차례다. 공교로운 것은 일제강점기에 문명상회라는 골동상을 운영하며 많은 한국 문화재를 일본인에게 매도한 이희섭이 그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1946년 7월 그의 기증에 대해서는 미군정으로 바뀐 새로운 세상에 영합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뿐이다. 김환기 화백은 부산 피란시절이었던 1953년 5월 국립박물관의 부산 임시청사에서 열린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했던 그의 유화 작품 한 점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1950년대의 첫 기증자가 되었다. 1950년대에도 간헐적으로 소량의 문화재가 기증되었을 뿐이다. 1954년 경상북도 영주의 숙수사지宿水寺址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등 21점(신수244)이 기증의 형식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는 학교 공사 중에 출토된 불상의 인도를 거부하는 현지 교장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17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돋보이는 기증 사례가 1959년에 있었다. 칠곡 송림사松林寺 오층전탑에서 조사된 사리장엄구(신331~342)가 국립박물관에 기증된 것이다.도6 송림사의 자비로운 기증으로 국립박물관은 통일신라시대의 귀중한 사리장엄구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0년대 전반에는 주한 외교사절의 기증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 주한 프랑스 대사였던 샹바르(Roger Chambard) 씨는 1960년과 1961년 두 차례에 걸쳐 불상을 기증했다.18 주한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이었던 핸더슨(Gregory Henderson) 씨도 19세기 말의 대형 <장생도 長生圖 > 병풍을 1962년 기증했다.도7 한국에 부임한 외교관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17 金載元 , 「宿水寺址 出土 佛像 에 對하여」, 『震檀學報』 19, 1958, pp.7-8. 18 국립박물관, “잡보”, 『미술자료』 3, 1961.

도 6. 송림사가 기증한 사리장엄구(신수331)
도 7. 주한미국대사관 핸더슨 문정관이 기증한 <장생도> 병풍(신수551)

한편 1961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기 이전에도 발견 신고가 접수된 문화재에 대해서는 문교부가 국립박물관에 감정을 의뢰했고, 국립박물관이 가치를 인정하는 문화재는 국립박물관에 귀속되었다.19 예컨대 1959년 화성군 일왕면에서 발견된 문화재(신수390~392)에 대해 문교부가 국립박물관에 감정을 요청하는 문서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도8 하지만 발견자가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국립박물관에 발견 문화재의 매도를 직접 신청하는 경우 국립박물관이 이를 매입하는 사례가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1960년대까지는 계속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발견 신고 및 국가귀속 절차에 따라 국립박물관에 입수되는 문화재의 비중은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발견품을 직접 국립박물관에 매도하는 경우는 없어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문화재 교환의 방법도 1961년에 진행되었다. 국립박물관은 필리핀국립박물관과 상호간에 자국의 문화재를 상대국 국립박물관에 보내는 사업을 진행했다. 문화교류의 차원에서 소량의 참고품을 보내는 것이기는 했지만 국유문화재의 개념이 확고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도였다. 필리핀국립박물관은 필리핀의 선사시대 토기 등 9건 11점을 국립박물관에 보냈고, 국립박물관은 석기 5점과 신라토기 4점을 필리핀국립박물관에 보냈다. 필리핀 측으로부터 받은 문화재는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등록되어 연구 자료로 활용되게 되었다.도9 20 이후 1965년에도 국립박물관은 덴마크 코펜하겐국립박물관과 문화재 교환을 진행하여 덴마크의 선사시대 石斧 등 62점의 석기(신907~954)를 기증의 형식으로 받았다. 19 1961년 1월 10일 <문화재보호법>의 제정·시행으로 “문화재로 인정된 물건으로서 그 소유자가 판명되지 아니한 것은 국고에 귀속한다(제47조)”는 규정이 명문화되었다. 국고로 귀속되는 문화재의 보관처가 법으로 규정된 것은 1973년 6월 28일 <문화재보호법시행규칙>의 개정 때부터이다. 이러한 보관처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관리국, 국립대학교의부속박물관, 지방자치단체 등이 포함되었다. 20 국립박물관, “잡보”, 『미술자료』 4, 1961

도 8. 발견 문화재의 국립박물관 보관 조치 문서(1959.12.2.)
도 9. 필리핀국립박물관이 교환 형식으로 제공한 토기(신수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