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톺아보기
유물로 보는 디자인
글.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고구려의 실용성과 통일신라 미학
부뚜막 鐵製爐 고구려  높이 29.1cm, 길이 67.2cm, 너비 23.0cm 본관5244 부뚜막 鐵製爐 고구려 높이 29.1cm, 길이 67.2cm, 너비 23.0cm, 본관5244

휴대용 가스레인지 ‘철제 부뚜막’

귀한 고구려시대의 유물이지만 녹이 많이 슬어 있기도 하고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모양의 작은 부뚜막이라서 이 작은 철 덩어리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 유물은 고구려시대의 앞선 생산기술과 윤택한 삶을 입증해주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고구려 영역이었던 요동지방과 백두산 인근, 두만강 일대는 막대한 철광 산지였다. 그래서 고구려는 좋은 철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기원전 3세기부터 강철을 생산했다. 그것으로 무기를 만들어 무장을 했으니 고구려는 오랜 세월 동안 중국과 싸우면서 중원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철로 무기만 만들지는 않았다. 출토된 고구려의 유물에는 망치나 도끼, 톱, 자귀, 끌과 같은 공구도 많이 있고, 가래, 괭이, 호미, 보습, 삽, 낫, 쇠스랑 같은 농기구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나라나 철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은 14, 15세기에 와서야 겨우 철을 용광로로 녹여 만들 수 있었고, 형틀에 철을 녹여 부어 주조하는 데에 유리한 주철은 18세기 초 코크스 제련법이 나온 이후에야 만들 수 있었다.
그전에는 철을 부분적으로 가열한 다음에 망치로 두드려서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경제성이 형편없었다. 강철은 영국의 발명가 헨리 베서머(Henry Bessemer)가 1856년에 새로운 제강로를 개발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이런 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철제 농기구가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일찍 보급 되었고, 그로 인해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이후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이루어지는 발판이 된다.
이런 유럽에 비하면 고구려의 철 문명은 거의 1800년 가까이 앞서 있었다.
물론 고조선시대의 철기 역사를 빼고도 그렇다. 고구려는 철제 농기구도 일찌감치 사용했기 때문에 농업 생산도 대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로 만들어진 고구려의 부뚜막은 여기에 더해 당시 철 가공품의 수준과 고구려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더 놀라운 사실들을 말해준다.
철제 부뚜막의 굴뚝 목 주변부나 몸통 부분을 자세히 보면 몇 개의 곡선들이나 직선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문용어로 이런 선들은 파팅 라인(Parting line)이라 한다. 붕어빵의 옆면이나 페트병의 몸통에서도 볼 수 있는데, 두 개 이상의 형틀이 결합되는 이음새 부분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파팅 라인이 있다는 것은 이 부뚜막이 형틀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형틀로 물건을 만들면 같은 모양을 빠른 속도로 저렴하게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경제적으로 구하여 쓸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 삶의 질이 매우 향상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가 현대사회를 만든 것과 유사하다. 고구려의 철제 부뚜막은 그런 점에서 공예품이 아니라 대량생산된 산업제품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고구려시대에 이런 산업제품을 부뚜막만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 고구려시대에는 부뚜막 말고도 많은 실용적 물건들을 철로 대량생산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당시 고구려 국민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철제품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매우 질 높은 삶을 꾸릴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구려는 땅만 넓은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풍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모두가 작은 철제 부뚜막이 말해주고 있는 사실이다.

초심지가위 한국, 광복이후  길이 16.0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초심지가위 한국 광복이후, 길이 16.0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금동초심지가위  金銅燭鋏 통일신라  길이 25.5cm  보물 안압지1479 금동초심지가위 金銅燭鋏 통일신라, 길이 25.5cm, 보물, 안압지1479

초귀족적 일용품 ‘초심지가위’

사는 모습이 다르면 사용된 물건들도 다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옛날의 유물들일수록 어떻게 썼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통일신라의 첨성대이다. 그런데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라도 초심지가위는 용도를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삶의 부분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 초심지가위는 명확한 기능을 가진 유물이면서도 형태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초 심지를 자른다는 단순한 쓰임새가 화려한 모양에 짓눌려 누추해 보일 정도다. 이 가위의 재료는 동판이고 그 위에는 도금이 되어있고, 몸체에 화려한 장식들이 많이 베풀어져있다.
그러니 화려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원래 세자가 기거했던 동궁터로 추정되는 안압지의 연못 안에 오랫동안 습기와 함께 오랜 시간동안 묻혀 있다가 발견된 것을 보면 아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가위는 사실 모양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가위의 두 날 위에 붙어있는 둥근 원기둥 같은 모양도 눈에 띈다. 가위의 날을 오므려 초의 심지를 자르면 이 부분이 작은 그릇을 만들면서 잘린 심지를 쏟아지지 않게 담는다. 가위를 오므린 채로 쓰레기통에 가져가 잘린 심지를 버리면 이 가위의 임무가 끝난다. 요즘의 아이디어 상품처럼 기능성에 대한 디자인적 배려가 아주 기발하고 현명하다.
그냥 보면 화려하지만 사용을 해보면 쓰임새도 뛰어난 초심지가위인 것이다. 작고 단순한 용도의 도구이지만 안에 담긴 심미성과 기능성의 조화가 웬만한 현대 디자인에 뒤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통일신라시대의 이 뛰어난 디자인은 조선시대 종묘제례에 사용된 초 심지 자르는 가위를 거쳐 오늘날 향초의 심지 자르는 가위에까지 이르고 있다. 모두가 가위 날 위에 둥근 테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자른 심지를 안전하고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어있다.
똑같은 구조의 가위가 일본의 고대유물을 보관해놓은 정창원에도 있다. 아마 통일신라의 것을 보고 만들었거나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작은 초심지가위 하나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보여준 문화 전파력이 대단하다.
아무튼 디자인 저작권은 가장 먼저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초심지가위에 귀속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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