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 52
가장 많은 특별전시회가 열린
특별한 한 해
글.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첫 번째 이야기

1963년이었다. 새해 벽두인 1월 9일부터 12월 말일까지 국립박물관은 특별전을 무려 11차례나 개최했다. 1955년 덕수궁 석조전을 박물관 청사로 삼아 다시 개관한 뒤로, 국립박물관은 한 해에 많아야 두세 차례의 특별전을 열어 오던 터였다. 1955년부터 1962년까지 국립박물관은 주력 사업이었던 〈한국국보전〉 국외 전시 사업과 전쟁 피해 소장품 현황 조사, 그리고 최소한의 발굴 조사 사업에 대부분의 인력과 시간을 투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해에만 왜 이렇게 많은 특별전이 열렸는지에 대해 특별한 증언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이러한 특별전 사업을 기획한 주역이 최순우[1916-1984] 미술과장이었다는 점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35년부터 개성부립박물관을 드나들면서 고유섭[1905-1944]관장을 사사했다. 1944년 고유섭 관장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국립박물관에 들어온 그는 고유섭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한국미의 특징에 대한 고민을 지속했다. 고유섭의 20주기를 맞아 쓴 글에서 최순우는 고유섭에 대해 “한국미술의 진가와 전통의 올바른 체득을 위해서 심신을 모조리 불살랐다”고 평했다.01 스승과 같은 길을 추구한 그는 한국 도자기를 전문 연구 분야로 하면서, 동시에 ‘한국미’ 전반의 특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02

01 최순우, “한국 미술사 및 이론의 개척자 –고유섭 씨 20주기에 부쳐-”, 『경향신문』 1964.6.27.자(『최순우전집』 제4권, 학고재, 1992, pp.304-305에 재수록). 02 최순우 과장은 1955년 「우리나라 미술 개설」을 잡지 『새벽』에, 이어서 1957년에는 『경기도지』에 「한국미술사」를 정리·개관했다. 이때부터도 한국미의 특징을 서두부터 천착했다. (권영필, 「혜곡 최순우 선생의 미적 삶과 한국미론」, 『그가 있었기에 -최순우를 그리면서-』, 2017, p.164 참조).

같은 맥락에서, 개항 이후 굴곡 많았던 역사 탓에 한국인 스스로도 제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소홀히 했던 한국미술을 문화적으로 복권復權하는 것 또한 그에게 큰 사명이 되었다. 이러한 사명 의식을 더욱 강화한 계기가 〈한국국보전〉이었다. 그는 1957년부터 1958년까지 〈한국국보전〉 미국 순회 관리관으로, 또한 1961년부터 1962년까지 같은 전시의 유럽 순회 관리관으로 근무했다.도1 앞서 살핀 대로 전시 기간 중 구미인들이 한국미술에 대해 내린 평가에 그는 많은 자부심을 느꼈고 이를 한국의 언론에도 자주 언급했다. 하지만 정작 한국미술을 무시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안타까움도 동시에 느껴야 했다.

도1. 〈한국국보전〉 1961년 유럽 순회전시 때 영국 스톤헨지를 찾은 김재원 관장과 최순우 미술과장 오른쪽부터 김재원 관장,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연구원, 최순우 미술과장, 김정기 학예연구관

이러한 상황에서 1962년 여름 유럽에서 돌아온 그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한국미술의 면면을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또한 가능한 한 자주 알리는 것이었다. 귀국 이후,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그는 적합한 전시 주제를 찾아 전시를 기획했을 것이다. 그는 과연 어떤 주제의 전시를 한국인들에게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도자기로 공부를 시작한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회화와 목공예까지 관심과 집필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03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분야와 시대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한국미술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역사 왜곡이 유독 심했던 시대가 조선시대였다. 일제는 조선시대를 퇴락과 쇠퇴의 역사로 강변함으로써 강점을 합리화하고자 했다.04

03 최순우 과장은 『서울신문』1954년 6월 7일자에 간송 소장 심사정 필 〈하마선인도蝦蟆仙人圖〉, 1954년 7월 29일자에 김홍도 필 〈군선도群仙圖〉에 대한 해설 원고를 실었다. 또한 『새가정』이라는 잡지에 목가구의 아름다움을 소개한 “가정과 생활미술”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충렬,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김영사, 2012, pp.173-176 참조). 04 Jang, Sang-hoon, A representation of nationhood in the museum, London: Routledge, 2020, pp.16-20 및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0, pp.1-3.

최순우 과장이 꼽은 1963년의 국립박물관 특별전 주제들은 이처럼 잘못된 인식을 깨기 위한 것들이었다. 현대 판화 전시 1건을 제외한 10건의 특별전 중 8건이 조선시대, 나머지 2건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미술문화를 조명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국문화를 대표한다는 취지로 기획한 〈한국국보전〉에서도 거의 출품되지 못했던 조선시대 문방 가구, 백자 항아리, 복식, 한글 서예 등이 1963년 특별전의 주제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주제 선정과 관련해서 그가 이미 1955년에 쓴 글이 주목된다.
“정절精絶을 다한 고려의 청자 문화는 잠시 미뤄두고라도 근세의 이조 목공예나 이조자기가 보여 준 높은 격조의 표현애와 정다운 실용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직하고 아름다운 우리 생활 정서의 본바탕이 되어 온 것이다.”05

05 최순우, “공예전통의 계승 –〈숙대 생활미술전〉을 보고-”, 『경향신문』 1955.12.17.자, (『최순우전집』 제4권, 학고재, 1992, pp.52-54에 재수록).

한국인의 미의식이라는 포괄적인 문제를 탐구하고자 했던 그는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추구한 미의식이 잘 드러나는 분야에 주목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활과 직결되는 가구나 자기에서 그 답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1963년의 첫 특별전을 꽃꽂이라는 파격적인 주제로 진행한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형식도 놀라웠다. 이상범, 배렴, 김환기, 박래현, 서세옥 등 미술가와 문인, 서예가 등 문화계 인사 30여 명이 직접 제작한 작품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각종 오브제와 어우러진 60여 점의 꽃꽂이 작품들은 출품자들 각자의 미의식과 정서를 선보이는 자리가 되었다.
최순우 과장 자신도 작품을 출품했다.도2 김환기의 출품을 돕기 위해 박물관을 찾았던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은 최순우 과장의 작품을 이렇게 기억했다.
“전시장 왼쪽 구석에 달 모양의 조선조 백자항아리 위에 꽃가지 하나를 수평으로 눕혀 놓은 것을 보고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아 … 그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고차원의 안목을 가진 주인공을 찾으니 그분이 바로 최순우 선생이었다.”06
이후 사제 관계를 맺은 두 사람은 한국미를 찾아 이를 생활공간 속에 실천하는 여정을 함께 했다. 이 인연으로 이후 김수근은 국립진주박물관과 국립청주박물관을 설계하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이러한 전시가 “처음 있는 일로 기대되는 바 크다.”는 평가를 하는가 하면,07 이 특별전이 꽃꽂이를 통해 한국 고유의 정서를 찾는 자리가 되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08
최순우 과장도 일본식 꽃꽂이가 한국에서 유행하는 것을 개탄하면서 한국 고유의 꽃꽂이가 있음을 언론 인터뷰에서 강조했다.09 이어서 3월에 열린 특별전은 〈꽃꽂이와 오브제〉 특별전에서 일부 출품되었던 조선시대 문방가구 등의 목공예품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이조 문방 목공예전〉이었다. 특별전 안내장의 문안을 빌자면, “견실하고 세련된 이조시대 서재용 목공가구의 아름다움을 나누고자” 마련된 이 전시는 문갑, 서상書床, 서가書架, 필통, 연상硯箱, 연함 등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서재 용품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는 첫 전시였다.10 도3,4

06 혜곡최순우기념관, 『그가 있었기에 -최순우를 그리면서-』 , 진인진, 2017, p.102. 07 『조선일보』 1963.1.9.자, 5면, “꽃꽂이와 오브제 국립박물관 주최로” 08 『동아일보』 1963.1.12.자, “고유미 찾는 첫 꽃꽂이전” 09 위의 글. 10 『경향신문』 1963.3.12.자, 5면, “옛 문사들의 체취”
도2. 최순우 작 정靜 『 경향신문』 1963.1.12.자, 5면, "시경 이룬 생활풍류"에서 옮겨실음
도3. 〈이조 문방 목공예〉 특별전 진열 모습 『미술자료』 제7호, 1963에서 옮겨실음
도4. 〈이조 문방 목공예〉 특별전 안내장

최순우 과장은 초기의 논저에서부터 “회화보다는 조각이, 조각보다는 건축이, 건축보다는 공예작품이 한층 성숙된 한국미의 전통을 보여주었으며, 이 공예작품 중에서도 조선조의 목공예품과 더불어 조선의 자기는 정말 착실하고 의젓하며 또 소박하게 아름답던 조선의 마음씨 그대로였던 것”이라고 정의했다.11
또한 그는 “이조시대 서민의 일상생활에서 쓰여지던 공예, 그중에서도 문방과 내실內室의 가구들 그리고 소도구들이나 식기류, 제기류 같은 공예 작품들은 (중략) 한국미의 가장 구체적인 결정체”라고 보았다.12
1963년 본격적으로 특별전을 기획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 바로 조선시대 목공예 특별전을 열었던 것은 바로 이처럼 분명한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특별전을 소개한 일간지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목공예가 특별전의 주제가 된 데는 안타까운 이유도 있었다.13 조선시대 목공예품에 매력을 느낀 외국인들이 많은 목공예품을 구입해서 해외로 반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순우 과장은 이러한 세태를 걱정하면서, “썩어서 사라지고 바다를 건너서 사라지는 과거 한국미의 결정들. (중략) 이대로 가면 이 아름다운 샘터는 멀지 않아 메마를 운명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따끔한 지적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조의 높은 문방 취미와 그 세련된 감각의 전통을 일반에게 널리 인식시키고 날로 수를 더하는 공예전공의 젊은 학생들에게도 자극을 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14

11 권영필, 「혜곡 최순우 선생의 미적 삶과 한국미론」, 『그가 있었기에 - 최순우를 그리면서-』, 2017, p.166. 12 『동아일보』 1967.6.29.자, 5면, “겨레의 알찬 유산 생활 속의 조형미” 13 『경향신문』 1963.3.12.자, 5면, “옛 문사들의 체취” 14 『동아일보』 1967.6.29.자, 5면, “겨레의 알찬 유산 생활 속의 조형미”

고미술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미술 평론을 하고 있던 최순우 과장은 현대미술관이 따로 없던 그 시절, 젊은 판화가들에게 전시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에도 열의를 보였던 것 같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판화5인전〉은 “판화 신인의 발굴과 그들의 조형발언의 기회를 주는 의도 아래 국립박물관이 마련한 것”이었다. 이 전시에는 윤명로, 김종학, 김봉태, 한용진, 강환섭 등 5인의 작품 20점이 출품되었다. 당시 전시를 홍보하기 위해 그들이 직접 판화로 제작했을 홍보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도5

도5. 〈판화5인전〉 포스터

조선시대 문방 목공예에 이어지는 다음 특별전 주제로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가 선정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앞서 살핀 대로 최순우 과장이 조선시대 도자 공예를 한국미의 결정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만큼 우선순위가 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20여 점의 백자를 한자리에 모아 집중적으로 조명한 이 전시도 유례가 없는 첫 사례였다.도6,7,8
최순우 과장은 백자도 국외 유출이 심한 실정임을 안타까워하면서, “모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것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우리의 자랑인 이조자기가 갖고 있는 청아·수려한 백색의 분위기를 다시금 살려보고 또 이 방면에 소홀했던 우리의 관심을 다시금 모아보는 것”이 전시의 취지라고 밝혔다.15 이러한 취지에 걸맞게 김환기, 도상봉, 박병래, 설원식, 이성희, 이홍근, 전충신 등 여러 소장가들의 애장품들이 출품되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박병래, 이홍근 두 분의 소장가는 이후 각각 1974년과 1980년 국립박물관에 소장품을 기증하게 된다.

15 『동아일보』 1963.4.8.자 5면, “이조백자전시”
도6. 〈이조 백자항아리〉 특별전 전시목록 표지
도7. 〈이조 백자항아리〉 특별전 진열 모습 『미술자료』 제 제7호, 1963에서 옮겨실음
도8. 수학여행으로 서울에 와 〈이조 백자항아리〉 특별전을 관람하는 학생들 『 경 향신문』 1963.5.6.자 5면에서 옮겨실음
명칭 일자 전시품
꽃꽂이와 오브제전 1.9.-1.20. 배렴 작 괴석 외 58점
이조 문방 목공예전 3.9.-3.31. 국립박물관 소장 삼층탁자 외 89점
판화 5인전 3.9.-3.31. 김종학 목판 외 15점
이조 백자항아리전 4.6.-4.30. 국립박물관 소장 큰항아리 외 119점
고구려벽화전 5.22.-6.23. 쌍영총 현실 인물행렬도 외 23점
이조 의상전[석주선 수집] 8.3.-8.16. 곤룡포, 천릭 등 109점
김원전金元全 씨 소장 도자전 8.10.-9.10. 김원전 씨 소장 도자 20점
이조 초상화 특별전 8.31.-9.30 국립박물관 소장 심득경 초상 외 32점
이조 역대 명인여류 한글서첩전 10.8.-10.27. 김양선 씨 소장 운해훈민정음(신경준) 외 58점
이담李潭 씨 소장 백자전 11.14.-11.30. 백자항아리 외 91점
고구려 불상 특별전 12.10.–12.31.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 외 3점
표. 1963년 국립박물관 개최 특별전 출처: 국립박물관, “잡보”, 『미술자료』 7·8, 1963 및 『경향신문』 1963.8.12.자, 5면, “한국적 감정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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