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 53
가장 많은 특별전시회가 열린
특별한 한 해
글.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두 번째 이야기

1963년의 다섯 번째 특별전 주제는 고구려 고분벽화였다. 국립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회화 전통의 조형이라고 일컬어지는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도 〈한국국보전〉에는 출품되지 못했다. 최순우 미술과장은 15년 전인 1948년 6월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관特別展觀〉(1948.6.1.-6.20.)을 연 경험이 있었다.01 같은 해 4월 서울 본관에서 열린 같은 전시를 개성분관에 유치한 것이었다.02 1940년대 후반 국립박물관의 4개 분관 중에서 특별전을 개최한 분관은 개성분관이 유일했다.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뿐만 아니라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시대 회화 특별전 (1948.10.12.-?)을 열기도 했다.03
광복 직전에 모사된 중화中和 진파리眞坡里 1호분 사신도四神圖 모사도 등 평양 지역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를 중심으로 만주 지안(集安)의 통구通溝 서강西崗 12호묘 및 17호묘 벽화 모사도 두 점을 합쳐, 모두 11개 고분에서 모사된 24점의 모사도가 출품된 1963년의 〈고구려 고분 벽화전〉(1963.5.22.-6.23.)에는 고구려 와당 44점도 함께 선을 보여 5~7세기 고구려 문화의 특색을 충실하게 보여주었다.04,도1 이 전시를 소개하는 팸플릿에는 전시품 목록만 제시되어 있지만,도2 1948년 개성분관의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 팸플릿에는 “이들 벽화에 표징 表徵 된 기우고원氣宇高遠하며, 패기만만한 고구려인의 시대정신과 웅혼雄渾, 또 유현幽玄 한 수법, 구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선인들의 위업에 다시금 머리를 숙이게 하는 바”라는 기획자의 소회가 담겨 있었다. 이어서 “훗날 이 강건한 전통 우에 다시 온화우미溫和優美 한 신라예술의 남방풍정南方風情이 어울리여, 우리 민족예술 전통의 기간基幹을 이룩하여 온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이할까?”라며 고구려 문화가 한민족 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를 제시하고 있다.도3
비록 이 글의 필자가 누구인지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당시 개성분관에서 특별전 개최를 담당했을 최순우를 그 필자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한 그가 〈한국국보전〉 유럽 순회전시를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고구려 고분벽화를 전시 주제로 삼은 것도 고구려 문화가 제대로 세계무대에서 알려지지 못한 아쉬움과 이어질 수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01 당시 개성분관이 제작한 팸플릿에 강서대묘, 강서중묘, 쌍영총, 수렵총, 통구12호묘 등에 있었던 벽화를 모사한 모사도 11점에 대한 해설 문안이 실려 있다. 02 『조선일보』 1948.4.22.자, 2면, “국립박물관에서 고구려 유물 전시”.
이 기사에 따르면 국립박물관은 “국보고적천연기념물애호주간”을 맞아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와 와당, 사진 등을 박물관 2층에 특별 전시했다.
03 국립박물관, 『관보』 제5호, 1948, p.15 및 『관보』 제6호, 1949, p.17. 04 『조선일보』 1963.5.28.자 “세계의 고분벽화”.
도1.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 모습 『미술자료』 7, 1963에서 옮겨 실음
도2. (왼쪽)“고구려 고분벽화 (모사) 전시목록”
도3. (오른쪽)1948년 개성분관 개최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관〉 팸플릿

다음 특별전이었던 〈이조 의상전〉도 비슷한 맥락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여러 면에서 파격이었다.
첫째, 고고학이나 미술사학 자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근대 박물관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복식이라는 분야를 국립박물관의 특별전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복식 중에서도 관련 자료가 남아있는 조선시대 복식이 주된 대상이 되었다. 둘째, 국립박물관에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없음에도 전시를 열었다. 셋째, 전통복식 연구자 석주선(石宙善, 1911-1996) 동덕여자대학 교수의 개인 소장품만으로 전시를 구성했다.도4,5,6 나비 연구자로 유명한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의 친동생이기도 한 석주선 교수는 광복 후 국립과학박물관의 공예연구실장으로 근무했고,05 6·25전쟁 이후에는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이어서 동덕여자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전통복식 연구와 자료 수집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06 석 교수는 이미 1958년 서울 중앙공보관中央公報館에서 〈이조의상전시회李朝衣裳展示會〉(1958.8.15.-8.22.)를 개최한 바 있었고, 1963년에 두 번째로 소장 의상 전시회를 국립박물관에서 열게 된 것이었다.
이 전시는 국왕의 곤룡포를 비롯하여 왕가 및 양반가의 예복과 평상복, 또한 민중들의 생활 복장이나 군복, 승복, 그리고 흉배胸背나 비녀처럼 신분과 권위를 드러내는 장식품, 갓과 신발, 띠, 매듭, 향낭, 부채 등 조선시대 복식을 구성하는 다양한 자료들을 망라함으로써 학계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특히 순조純祖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의 유품이 주목을 받았다. 석 교수는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尹伯榮 씨로부터 관련 자료를 구입하거나 기증받는 노력을 기울였던 터였다.07 그 결과 덕온공주의 대례복 원삼圓衫과 소례복 당의唐衣 등이 출품되었고, 석주선 교수가 재현한 왕비의 적의翟衣 등 조선시대 복식 30여 점도 전시되었다.08 이 전시는 전통 의상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또한 역사극에 등장하는 복장의 고증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는 언론의 기대를 받았다.09

05 난사 석주선 박사 추모사진집 간행위원회, 『한국복식학자 고 난사 석주선 박사 추모 사진집』, 1998, p.132. 일제강점기인 1927년 설립된 은사기념과학관이 광복 후 국립과학박물관이 되었고 1949년에 국립과학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0년 6·25전쟁 중 전소되었다. 06 석주선 교수는 1961년에 『우리나라 옷』 (광문사 刊)이라는 연구서를 펴냈고, 같은 해에 문화재위원회 문화재위원이 되었다(위의 책, pp.132-133). 07 박성실, 「 德溫公主家 유물 소장 배경과 유형별 특징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제30회 학술발표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 家 의유물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12, pp.15-20. 08 『동아일보』 1963.8.3.자, 5면, “이조시대 의상전 개최” 09 위의 글.
도4. “이조 의상전 목록” 표지
도5, 6. 〈이조 의상전〉 전시 모습과 석주선 교수 『한국복식학자 고 난사 석주선박사 추모사진집』 , 1998, p.37에서 옮겨 실음

당시 특별전을 찾은 관람객의 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 전시는 “국립박물관 개관 이래 손꼽히는 관객 동원의 기록”을 세웠다.10 특히 이 전시에는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도 방문했다. 전시를 본 육 여사는 석교수를 만나, 한복 차림으로 파티에 나갈 때 하이힐을 신었던 것을 부끄럽게 느끼게 됐다고 술회했다고 한다.11 관객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석 교수에게 전시된 복식의 보관처에 대해 질문하자 “살림집 안방이나 다락에 둔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어 망설이는데, 박물관에서 곧 새로 (민속박물관을) 짓게 된다”고 얼버무렸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12 이처럼 개인 수집품을 국립박물관에서 전시하는 드문 일이 석주선 교수 수집 복식 전시로 가능해졌던 때문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1963년에는 도자기 수집가이자 기업가인 김원전金元全 씨와 이담李潭 씨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도 각각 8월과 11월에 열렸다. 김원전 씨의 소장 도자 전시를 개최한 최순우 미술과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컬렉션을 마련해 갖고 있는 수집가에게 그같이 제공될 계획”이라면서 “관심 있는 이들에게 수집열을 갖게 하고 일반 교양인들에게도 이해를 높이려는” 것이며 “이러한 계획이 고미술품의 해외유출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13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국립박물관에서 실현되기 쉽지 않았을 개인 컬렉션 전시들이었다. 무엇보다 출품된 개인 소장품의 진위에 대한 이견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또한 국립 문화기관에서 전시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개인 소장가에게 모종의 이득을 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문화재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적은 데 비해, 그 가치를 알아보는 외국인들은 늘어서 문화재 유출이 큰 사회 문제가 되어가는 시점에서,14 한국인들의 문화재 애호 의식을 높이기 위해 국립박물관이 선택한 독특한 방법 중 하나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의 호의적인 평가는 국립박물관의 이러한 의도가 무난하게 관철되었음을 보여준다.15

12 위의 글. 13 『경향신문』 1963.8.12.자, 5면, “한국적 감정 나타나, 박물관에 민속자기 진열” 14 1963년 5월 한 업체의 한국 문화재 수출 시도가 사회 문제로 비화되었고, 이와 관련해 감정을 맡았던 국립박물관도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된 일이 있었다. 『동아일보』 1963.5.11.자, 7면, “달라에 팔려가는 문화재 140점, 창피한 수출에 긴급 이의” 및 『동아일보』 1963.5.13.자, 7면, “문교부서 문화재 수출 금지” 15 『동아일보』 1963.8.12.자, 5면, “시점 모우는 예술의 향기, 민예도자를 전시”; 『경향신문』 1963.8.12.자, 5면, “한국적 감정 나타나, 박물관에 민속자기 진열”; 『경향신문』 1963.11.18., “통일성 있는 안목, 이담 씨의 수집품 특별전”

8월 말일에는 이 해의 특별전 중 전시기간이 가장 길게 기획된 〈이조 초상화 특별전〉이 개막해 9월 말일까지 진행되었다.도7,8 〈한국국보전〉에도 초상화가 출품되었지만, 미국 전시에 1점, 유럽 전시에 3점이 출품되었을 뿐이었다.16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프랑스 파리 전시의 거리 홍보 현수막에 신라 금관이나 금동반가사유상이 아니라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가 크게 실린 것이었다. 최순우 미술과장에게 조선시대 초상화의 ‘가능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조의 초상화들을 일당一堂 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일찍이 없었다.”는 한일간지의 소개처럼,17 이 전시는 한국 회화사에서 초상화의 위치를 처음 드러내는 전시였다.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고려대학교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 그리고 김양선金良善, 이가원李家源 등 개인 소장가들이 출품한 35점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는 조말생, 무학대사, 정몽주, 이항복, 송시열, 강세황, 김정희 등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친 여러 인물의 초상화를 소개했다. 당시 언론은 터럭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실주의적 표현과 함께 인물의 정신을 함께 드러내고자 했던 조선시대 초상화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음을 지적했다.18
최순우 과장은 전시 기간 중에 전시품 중 6점의 초상화에 대한 해설 기사를 『동아일보』에 실어 “지상紙上 전시展示”를 진행하기도 했다.19
국립박물관이 이 특별전을 계기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오후 9시 30분까지 야간 관람 제도를 운영한 일도 기록해 둘 만하다.20

16 〈한국국보전〉 미국 전시에는 송시열 초상, 유럽 전시에는 송시열, 황치온, 조말생의 초상이 출품되었다. 17 『경향신문』 1963.9.2.자, 5면, “이조의 초상화 30점, 국립박물관서 전시” 18 위의 글. 19 최순우, “ 紙上 李朝肖像畵展(1) 三山齋 金履安像 ”, 『동아일보』 1963.9.3.자, 6면 및최순우, “ 紙上 李朝肖像畵展(2) 阮堂 笠履圖 ”, 『동아일보』 1963.9.10.자, 6면. 20 『동아일보』 1963.8.30.자, 8면, “국립박물관 수요,토요일 야간관람 실시”
도7. (왼쪽)“이조 초상화 특별전시 목록” 표지
도8. (오른쪽)〈이조 초상화〉 특별전 모습 사진 출처: 조선일보DB

이어서 10월에 열린 〈이조 역대 명인여류 한글서첩전〉 또한 〈한국국보전〉 국외전시에서 전혀 소개되지 못했던 서예 및 한글 분야를 본격적으로 조망하는 전시였다. 한국 문화의 정체성과 떼려야 뗄 수 없지만, 1950년대 구미 큐레이터의 시각과 관점이 주도했던 〈한국국보전〉 사업에서는 제외되었던 분야였다. 전시 기획 방식도 파격이었다.
이번에는 국어국문학회(회장 김동욱 연세대학교 교수)라는 학회와 손을 잡고 조선시대 한글 서간의 출품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한글의 쓰임새와 관련하여 ‘여인’들의 한글 서간을 특정한 것도 특징적이었다.
국립박물관의 이러한 기획에 소장자들의 호응이 뒤따랐다. 이가원, 김동욱金東旭, 김일근金一根, 조윤제趙潤濟, 이병도李丙燾, 金庠基, 김양선, 이겸로李謙魯, 김약슬金約瑟 등 한문학·국문학·역사학 연구자와 수장가들이 애장품을 출품했고, 〈이조의상전〉에도 출품했던 윤백영 씨도 가전되던 한글 서간을 다수 출품하여 전시를 빛냈다. 한글날을 계기로 마련된 이 전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한글과 한글 서예의 존재를 알리는 첫 전시로 그 가치를 재인식하는 장이 되었다.21
끝으로 1963년의 대미를 장식한 〈고구려 불상〉 특별전은 이해 7월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칠년명延嘉七年銘 금동여래입상(1964년에 국보 지정)을 소개하기 위한 일종의 속보速報 개념의 전시였다. 현존하는 불상 중 제작연대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4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국보 중의 국보가 발견된 일을 신속하게 소개한 것이었다.

21 『경향신문』 1963.10.9.자, 5면, “한글글씨 전시회”

1963년 국립박물관이 11건의 크고 작은 특별전을 여는 데 있어서 최순우 미술과장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도9 개성부립박물관 고유섭 관장을 사사한 이래 한국미술 전반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지식을 축적해 오던 그는 <한국국보전> 미국 순회와 유럽 순회 전시에 참여하면서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국보전>이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표상할 목적으로 기획되었지만, 조선시대의 백자, 목가구, 복식, 초상화, 한글 그리고 고구려 문화 등 정작 이 전시가 놓친 부분은 적지 않았다.
최순우 과장은 조선시대 미술문화에 주목하면서 그중 소홀히 여겨진 분야를 찾아내서 특별전시의 주제로 재조명했고, 이로써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하나 복권해 내고 있었다.
이렇게 1963년에 시도한 여러 분야의 ‘첫’ 전시는 1970~1980년대에 전개된 좀 더 진전된 특별전의 선구가 되었다. ‘이조李朝’를 전시 제목의 첫 단어로 하는 1960년대의 특별전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조선시대 미술문화의 정당한 의미와 가치를 되찾고자 하는 힘 있는 외침이었다.

도9. 국립박물관이 1963년에 연 특별전의 전시 팸플릿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