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호부터의
    현장 에세이를 전해 드립니다

    1970년 시작된 이야기
    박물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다

귀(貴)한 사랑

하효길(前 국립민속박물관장)
『박물관신문』 1979년 10월 1일(통권 98호)

한 집안이나 나라에는 그 집안이나 나라만이 소중(所重)히 지녀오는 귀(貴)한 물건(物件)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그 집안의 가보(家寶)라는 것이요, 한 나라의 문화재(文化財)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시중(一般市中)이나 상계(商界)에서는 이 문화재(文化財)를 일반적(一般的)으로 골동품(骨董品)이라 부르고 있다. 문화재(文化財)와 골동품(骨董品)의 용어(用語)의 개념(槪念)은 정신적(精神的)인 것과 금전적(金錢的)인 것의 차이로 인식(認識)하게 한다. 즉 전자(前者)는 보물(寶物)의 가치(價値), 후자(後者)는 보석(寶石)의 가치(價値)로 비유 표현(表現)할 수 있다. 이 정신적(精神的)인 가치(價値)를 지닌 보물(寶物)은 흙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나무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으며, 무쇠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이 문화재(文化財)는 그 민족문화 (民族文化)의 척도(尺度)의 기준(基準)이 되기도 하며, 그 민족(民族)에 긍지를 갖게 하고 새 문화창조(文化創造)의 토대(土臺)가 된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돈 많은 자의 이 문화재(文化財)의 수집(蒐集)이 패물 모으기와 같은 재산형성(財産形成)의 한 수단(手段)으로 되어 한때에는 관계 악덕상인(關係惡德商人)이나 애호가(愛好家)라는 미명(美名)의 악덕재벌급(惡德財閥級) 수집자중(蒐集者中)에 문화재(文化財)의 도굴(盜堀)을 조장(助長)하면서 분별(分別) 없이 모으고 국외반출기도(國外搬出企圖)의 소문을 나게 하면서까지 엄청나게 더러운 이익(利益)을 본 자가 없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에게 죄(罪) 를 지으면서까지 그렇게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 문화재(文化財)를 아끼고 사랑하던 분은 따로 있었다.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부터 봉급 일부(一部)로 이조시대(李朝時代)의 백자(白磁)를 한 점 한 점을 사모아 평생 자기의 살갗처럼 아껴온 그 전부(全部)를 자기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고 더 보고 싶어 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가장 잘 지녀줄 수 있는 국립박물관(國立博物館)에 선뜻 기증해온 분도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성(聖) 루가병원(病院)과 성모병원(聖母病院)을 설립(設立)하고 인술(仁術)로서 많은 괴로운 환자들을 구원 해주던 고(故) 박병래 박사(朴秉來博士)다. 그것이 1974년, 당시 금전적(金錢的)으로도 그 평가액(評價額)이 19억이 넘었다고 한다. 박병래 박사는 그 아껴온 문화재(文化財)를 국가(國家)에 돌려준 후 타계(他界)하셨으나 또 그분의 뜻을 이은 미망인(未亡人) 되시는 분에 의해 박물관(博物館)과의 인연은 더욱 깊어 가고 있으니 매년 국향(菊香) 어린 가을이면 불암산 삿갓봉 아래의 넓은 농원(農園)의 자연(自然) 속에 박물관 직원 (博物館職員)들을 초대(招待)하여 성찬(盛饌)을 베풀고 직원(職員)들에게 긍지와 신념(信念)을 북돋아 주는 일을 거르지 않으신다. 이분들이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소중(所重)한 이 유물(遺物)들을 골동품(骨董品) 아닌 보물(寶物)로 생각하는 분들이요, 문화재(文化財)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분들이 아니겠는가.

‘두더지의 辯’은 1970년 『박물관신문』 창간과 함께 수록된 박물관 사람들의 현장 에세이입니다.
본 원고에서는 원문을 현대 표기법에 맞춰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