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박물관
“어느 수집가의 초대”
영상 콘텐츠 제작기
글. 이재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2022. 4. 28. ~ 8. 28.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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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품과 영상 콘텐츠의 균형

최근 영상 콘텐츠는 박물관 전시에 빠트릴 수없는 요소가 되었다. 전시품과 영상 콘텐츠가 같은 공간에 설치되는 기획전시에서는 특히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찾아야 한다. 전시품과 영상이 기획 의도 안에 하나로 녹아들 때 비로소 전시에 생기를 더해줄 수 있다.
전시기획에 맞게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전시품 유형과 공간 분위기에 알맞은 송출 매체를 선택하고, 조명까지 고려하는 과정을 거쳐야 영상 콘텐츠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2022. 4. 28. - 8. 28.)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 간 1년 남짓한 시간을 소개한다.

2021년, 비를 기다리고 바람을 일으키다

전시품의 정보와 정서를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영상 만들기, 간단해 보이지만 고단한 작업이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와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를 소개하는 영상을 제작하면서 계절과 날씨에 좌우되는 야외 촬영의 어려움을 깊이 느꼈다.
‘인왕산을 거닐다’는 〈인왕제색도〉의 배경을 소개하는 영상이다. 2021년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2021. 7. 21. - 9. 26.) 전시실 입구에 상영했고, 이번 특별전에도 활용하고 있다. 정선鄭敾이 장맛비 갠 인왕산을 바라본 순간을 재현하기 위해 지난해 5월 초부터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 장소를 섭외했다.
필자가 인왕산 자락에 살고 있었기에 여러 차례 산행하며 촬영 동선을 미리 정할 수 있었다.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린 1751년 윤5월의 그날처럼 비가 오고 개는 날씨를 담아야 했지만 쾌청한 하늘이 야속하게 이어졌다. 5월 16일 새벽, 초조하게 기다리던 일기예보대로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협조로 오촌댁 처마에 떨어지는 빗물을 촬영하고 인왕산에 스치는 비구름을 타임랩스 카메라에 담았다.도1 넉넉한 비는 그날로 그쳐버려서 하루만 머뭇거렸어도 전시 일정에 맞추어 다시 촬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편집된 영상에는 여름의 촉촉한 감성이 담겨 있었다. 배경음악으로는 〈비에 젖은 해금〉(류형선 작곡, 강은일 연주)을 선곡했다. 해금 선율은 정선의 시선과 마음을 따라가는 정서적 경험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도1. ‘인왕산을 거닐다’ 영상 장면

올해 특별전에 상영되고 있는 김홍도金弘道의 〈추성부도〉 영상은 지난해 10월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계절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기에 가을이 가기 전에 촬영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문학을 옮긴 그림이다보니 실경과 그림을 일대일로 보여줄 수 있었던 〈인왕제색도〉와 다르게 서사를 은유로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가을 숲에 자리한 〈추성부도〉 속 서재 분위기를 재현할 공간을 고민하다가 최순우 옛집이 떠올랐다. 내셔널트러스트의 협조로 11월 30일 늦가을 밤에 촬영을 진행했다. 바람은 자꾸 멈추어서 의도했던 장면을 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해결책은 바람을 일으키는 것. 준비한 소품이 없어서 마당의 낙엽이 흩날리도록 점퍼를 휘둘러가며 촬영했다. 완성된 영상은 고요하고 고독하지만, 카메라 앵글 바깥에서는 진땀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었다.도2,도3

도2. ‘〈추성부도〉에서 듣는 가을바람 소리’ 영상 장면
도3. 최순우 옛집에서 야간촬영(2021. 11. 30.)

터치모니터, 관람객이 주도적으로 보는 콘텐츠

스마트폰에 익숙한 관람객들은 터치모니터로 전시품 정보를 보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전시 기획자 입장에서도 터치모니터는 인쇄된 설명카드보다 더 상세한 정보를 담아낼 수 있어서 편리하다. 정약용丁若鏞의 〈정효자전鄭孝子傳〉과 〈정부인전鄭婦人傳〉은 전시품 바로 곁에 터치모니터를 설치해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했다. 〈채용신의 평생도 병풍〉처럼 세부 서사가 풍부한 그림도 터치모니터로 설명을 보여주었다.
작년 전시부터 활용한 고려 불화 터치모니터 콘텐츠는 보존과학부가 촬영한 적외선 사진과 엑스선 사진으로 맨눈에 보이지 않는 밑그림과 채색층을 볼 수 있다. 가장 호평을 받은 콘텐츠는 책가도처럼 연출한 진열장 속 전시품을 찾아보는 ‘수집가가 모은 물건들’이었다. “수집가는 이처럼 다양한 물건에 관심을 기울인다”라는 전시의도를 살리기 위해 개별 설명카드를 놓지 않고, 터치모니터에서 전시품을 고르면 설명이 나타나도록 했다. 원래 도록 사진을 모아 연출하려고 했지만, 영상 업체의 제안으로 실제 진열장을 촬영해서 더 직관적인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다.도4 전시품 설치 첫날 작업을 마치고 곧장 진열장을 촬영했다. 그로부터 전시 개막까지 5일 동안 빠듯한 일정으로 터치모니터 콘텐츠를 완성했다. 관람객이 터치모니터에서 정보를 찾아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바쁘게 일한 보람을 느낀다.

‘조선 사람이 꿈꾸었던 수집품’ 터치모니터
도4. ‘수집가가 모은 물건들’ 터치모니터

프로젝션, 공간과 전시품에 깊이를 더하다

프로젝터로 디지털이미지를 벽면이나 바닥에 투사하는 영상은 양날의 검이다. 영상이 공간을 장악하므로 관람객의 몰입을 도와주지만 자칫하면 실물 감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분청사기・백자실 ‘달항아리의 방’ 프로젝션을 만들 때 시행착오 속에서 느낀 점이었다.
이번 특별전에서도 프로젝션 공간에서 전시품과 영상의 조화를 고심했다. 조선 목가구를 전시한 공간에는 ‘창’의 인상을 프로젝션으로 나타내었다. 세로로 긴 비율과 벽면을 약간 파고 들어간 시공은 한옥 창호를 은유하는 장치였다. 자연 풍광을 투사해 본 뒤, 이현숙 디자이너는 이를 흑백으로 재편집할 것을 제안했다. 어딘지 그리움이 느껴지는 단색조 영상이 불그스름한 목가구의 색감과 공간 분위기를 더 살려줄 것이라는 이유였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도5

도5. 목가구 전시공간 프로젝션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수련이 있는 연못〉 공간은 프로젝션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곳이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국내 관람객 앞에 걸리는 만큼 최대한 몰입해서 감상하도록 프로젝션을 쓰고 싶었다. 모네의 수련 연작 중에 청색이 돋보이는 미국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소장품(1906년 작) 디지털이미지를 활용해 일렁이는 물의 느낌을 강조했다. 이미지가 바닥면에 또렷하게 투사되도록 여러 샘플을 시험해본 뒤 연회색 데코 타일을 깔았으며, 벽면 아래쪽에 거울을 붙여서 연못이 넓게 이어진 듯한 효과를 연출했다.도6
물결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연출을 위해 신중하게 배경음악을 선곡했다.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는 모네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작곡가이며 회화적 인상을 음악으로 표현했으므로 전시품에 잘 어울리는 곡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전시를 준비하는 틈틈이 드뷔시의 악곡을 들어본 뒤 전주곡집(Préludes) 제1권 8번 〈아마빛 머리의 소녀(La fille aux cheveux de lin)〉를 선정했다. ‘빠르거나 극적이지 않은 음악’, ‘악곡의 시작과 끝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서 반복해서 들어도 완결되는 느낌이 덜한 음악’이어야 그림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관람객이 물가에 와 있는 것처럼 몰입할 수 있도록 음악에 새소리를 은은하게 얹어 영상을 완성했다.
어둠 속에 조명을 받은 그림, 바닥에 흐르는 프로젝션과 피아노 선율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독특한 정서적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도6. 〈수련이 있는 연못〉 전시공간 프로젝션

디지털 영상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또 보편화되고 있다. 영상 콘텐츠를 ‘신기한 볼거리’로 받아들였던 관람객들도 이제는 오감으로 ‘경험’하기를 원한다. 이번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감각을 자극하는 총체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편안한 공간에서 문화적인 경험을 만끽할 수 있는 전시’라는 기획 의도가 뚜렷했기에 영상 콘텐츠도 여러 전시 요소와 잘 조화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수집가의 초대’가 ‘편안하고 즐거운 초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상 만들기에 담긴 이야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