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아카이브기행 55
국립박물관 본관과 소속 분관이 펴낸
박물관 안내서
글.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1947년 국립박물관의 첫 한글 안내서 발행

1945년 12월 문을 연 국립박물관 서울 본관은 1947년 10월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한글로 된 박물관 안내서(“국립박물관 본관 안내”)를 펴냈다.01,도1,도2 국립박물관의 물리적 전신인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조선총독부박물관약안내〉라는 소책자 형식의 일본어 안내서를 1926년에 펴냈고,02 이어서 1936년에 개정판까지 간행했던 것을 떠올리면, 일제 치하를 벗어난 뒤 2년 뒤에야 국립박물관이 안내서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당시 국립박물관이 감당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26년 이래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안내서가 본격적인 도록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시실과 전시품, 그리고 경복궁의 모습을 담은 사진 도판을 실은 소책자 형식이었던 데 비해, 1947년 한국 국립박물관의 첫 안내서는 팸플릿 형식으로 시작되었다.03 하지만 가로 13.5cm, 세로 18.5cm 정도로 한 손안에 들어오는 아담한 크기로 접히는 이 안내서에는 12쪽의 지면 위에 박물관 안내 지도와 함께 200자 원고지 68매 분량의 비교적 많은 원고가 실려 있다.04
당시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보여주듯이 비록 갱지 위에 인쇄된 안내서지만, 그 문안에는 해방된 나라의 국립박물관이 갖는 위상과 역할에 대한 자부심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박물관의 연혁과 전시 특성, 관람 방법을 요약한 서문에, “국립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유적을 발굴 조사할 과제를 가진 유일한 국가의 기관”임을 전제하고, 이어서 “우리 박물관 소장품으로 동양문화 전반에 대한 우리 민족의 문화상 역할을 알 수 있다”고 밝힘으로써, 신생 국립박물관의 기능과 임무를 강조하고 있다.05

01 장상훈, “새로 확인한 관사 자료로 보는 1940년대 후반의 국립박물관 (2)”, 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 22, 『박물관신문』 2019년 10월호, p.28 참조. 02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26년 4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학술지로 『博物館報』를 펴내면서 그 제1권 제1호를 “조선총독부박물관약안내”라는 이름의 판매용 안내서로 제작했다. 03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21년에 펴낸 “朝鮮總督府博物館槪要”도 팸플릿 형식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이것이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조선총독부박물관 안내서이다. 04 장상훈, 앞의 글, 2019. p.28. 『박물관신문』. 국립박물관은 1947년 10월 22일부터 이 안내서를 박물관 관람객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가격은 성인 관람료의 3배인 15원이었으며, 일종의 임의 조직으로 보이는 관우회 館友會 에서 판매를 담당했다(국립박물관, 『관보』 3, 1947, p.4).
05 장상훈, 앞의 글, 2019.
도1. 〈국립박물관 본관 안내〉 표지
도2. 〈국립박물관 본관 안내〉 내용

국립박물관의 첫 한글 안내서가 나온 뒤, 그 이듬해인 1948년 10월경에 작성된 영어 안내서 문안도 확인된다.도3 그런데 이 문안은 그저 한글 안내서 문안의 영어 번역문이 아니었다. 문안의 작성을 맡은 사람은 미군정의 문화재 전문가로 서울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동양미술사학자 채핀(Helen Chapin, 1892-1950)이었다. 국립박물관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인인 데다 동양미술사학자였던 그는 국립박물관 영어 안내서 작성의 적임자였을 것이다.
그는 『조선총독부박물관약안내』와 “국립박물관 본관 안내”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 이 문안을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객의 동선을 따라 각 전시실의 개별 진열장 별로 전시품에 대해 기술할 만큼 채핀은 비교적 상세하게 전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06

06 국립박물관이 1947년 6월부터 작성한 〈순검일지 巡檢日誌 〉의 1947년 8월 19일자 기록에 “각 진열관에 영문 안내서를 배치”했다는 기술이 있어서 이미 이 시기에 영문 안내서가 작성되어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947년 국립박물관 서울 본관이 팸플릿 형식의 안내서를 펴내자, 개성분관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 개성은 서울 시민과 학생의 소풍 장소로 사랑받는 곳이었고, 개성분관은 1931년에 개관한 개성부립박물관開城府立博物館의 후신으로 많은 학생들과 여행자들이 찾는 장소였다. 개성분관은 1948년 6월 소책자 형식으로 『국립개성박물관안내』라는 안내서를 펴냈다.도4 개성분관은 어디까지나 국립박물관의 분관이었지만, “국립개성박물관”이라는 명칭을 과감하게 사용한 점이 먼저 눈길을 끈다. 엄밀히 따지자면 “국립개성박물관”이라는 직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성분관이 이러한 한글 안내서를 펴내는 데는 일제강점기 개성부립박물관이 1936년에 펴낸 『개성부립박물관안내開城府立博物館案內』가 참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총 52쪽의 이 안내서는 고려의 역사, 박물관 연혁, 전시품 소개를 주된 내용으로 하면서, 박물관 전경 사진과 전시관 지도, 그리고 전시품 사진 도판 8매를 수록했다. 특히 개성부윤開城府尹 김병태金秉泰가 쓴 ‘박물관기博物館記’나 지역의 유지로서 박물관 건립 기금을 출연했던 손봉상孫鳳祥과 공성학孔聖學 이 함께 쓴 박물관기가 권두에 실린 것은 지역 박물관으로서 개성부립박물관의 위상을 잘 드러내는 일이었다.

도3. 국립박물관 영어 안내서 문안
도4. 『국립개성박물관안내』

이러한 개성부립박물관을 전신으로 하는 개성분관은 해방공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안내서를 펴내면서 현실적인 선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 전경 사진 한 장만을 남기고 인쇄비용이 많이 드는 전시품 도판은 모두 생략했고, 박물관기나 고려의 역사 같은 내용도 삭제했던 것이다. 이로써 개성분관의 『국립개성박물관안내』는 총 35쪽의 지면 위에 전시품을 소개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진열품의 대요를 설명하면서 “고려조의 예술문화 유물에만 중점을 둔 향토박물관으로서가 아니라 (중략) 선사시대 이강以降 최근세에 이르기까지의 고고, 역사, 미술의 유물을 모으기에 힘써서 지방의 일반 민중과 학도들의 탐구열을 붇도두려 애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07 이러한 입장은 일제강점기 개성부립박물관의 안내서에 “고려왕조의 예술문화를 수집하고 전시하기 위해 그 옛 수도에 건설된 향토박물관이므로 전시품도 주로 고려왕조의 유물을 진열하고 비교연구에 필요한 정도로만 다른 시대의 유물을 다소 진열했다”고 한 점과 크게 다른 것이다.08
이러한 맥락에서 『국립개성박물관안내』의 전시품 소개는 일어판이었던 『개성부립박물관안내』의 충실한 번역에 그친 것이 아니었고, 유물 소개의 내용도 순서도 필요에 따라 조정되었다.
특히 개성부립박물관은 안내서 서화 부문에서 정몽주鄭夢周의 초상과 길재吉再, 성삼문成三問의 필적을 다루었던 데 비해, 개성분관은 안내서 서화 부문에 고려 고분 벽화를 소개하고 있다. 1916년에 발견된 벽화와 더불어 광복 후인 1947년 3월 국립박물관이 조사한 고려 고분(장단군 법당방法堂房 고분) 벽화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광복 후 국립박물관의 사업성과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을 것이다.09
한편 개성분관은 일제강점기에 제작되었던 일어판 『개성부립박물관안내』 책자 재고분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이 속에 들어 있던 전시품 사진 도판을 따로 재활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남아 있어서 흥미롭다.10 즉 따로 뜯어낸 사진 8매를 “개성박물관 진열품 사진엽서(8매 1조)”라고 간이 인쇄된 포장지에 싸서 일반에 판매했던 것으로 보인다.11,도5

07 국립박물관 개성분관, 『국립개성박물관안내』, 1948, pp.4-5. 08 開城府立博物館, 『開城府立博物館案內』, 1936, p.9. 09 『국립개성박물관안내』는 정몽주 초상, 길재·성삼문의 필적에 대해서는 안내서 말미에 별도의 지면을 두어 다루고 있다(『국립개성박물관안내』, pp.34-35). 10 홍사준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장이 수집한 자료로 현재는 연재홍사준기념사업회가 소장하고 있다. 11 이 엽서집을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것으로 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간이 인쇄된 포장지의 형식 등을 보면 광복 이후의 재활용일 가능성이 크다.
도5. 개성박물관 진열품 사진엽서 세트 표지와 사진엽서

한국전쟁 정전 직후인 1953년 10월 공주분관도 『국립공주박물관 안내 부 공주사적명승』이라는 이름의 안내서를 펴냈다.도6 1951년 하반기의 관람객 통계가 작성된 것으로 미루어, 서울 본관과 개성분관을 제외한 경주분관, 부여분관, 공주분관은 적어도 이시기부터는 상설전시를 운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글 안내서의 필요성은 분명했고, 공주분관이 서울 본관과 개성분관에 이어 안내서를 펴내게 된 것이다. 공주분관도 개성분관의 전례를 참고하여 소책자 형식으로 안내서를 펴냈고 박물관의 이름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이 아닌 국립공주박물관이라 칭했다.
공주분관은 새로 펴내는 안내서의 내용을 구성하기 위해 개성분관 안내서의 체재를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12 박물관의 연혁을 시작으로 전시품의 개요를 정리하고 이어서 분야별 전시품을 따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개성분관이 전시품을 장르 별로 분류한 데 비해, 공주분관은 석기시대부터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이조시대 등 시대별 분류를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석조유물과 불상, 서화 분야를 추가하고 있다.
안내서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공주 일대의 사적과 명승을 안내하는 문안을 권말에 실은 것은 공주분관 안내서의 특징이다.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등 공주읍내의 유적을 비롯하여, 계룡산 일대의 사찰과 도요지, 마곡사麻谷寺 , 대통사지大通寺址를 소개하고 있다. 공주분관이 공주와 그 일대를 탐방하는 이들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박물관 관계자들의 희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다.13
공주분관의 안내서에 사진 도판을 싣지 못한 것 또한 당시의 어려운 예산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의 전신으로, 1940년 창설되어 公州史蹟顯彰會가 운영하던 공주박물관이 안내서를 만들어 운용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3 이후 1966년에 발간된 영어판 경주분관 안내서(Kyǒngju and Kyǒngju Museum)도 공주분관의 예와 마찬가지로 권두에 경주 지역의 명승고적을 소개하고 있다.
도6. 『국립공주박물관안내 부 공주사적명승』

한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소속 분관이었던 경주분관이나 부여분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朝鮮總督府博物館 경주박물관략안내慶州分館略案內』와 『조선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략안내扶餘分館略案內』를 각각 1937년과 1939년에 발간하여 운용했다. 이러한 참고자료를 가지고 있는 두 분관은 광복 이후 한글판 안내서를 내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940년대 후반의 해방공간에 두 분관이 간이 인쇄 방식으로나마 안내서 제작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부여분관이 1954년에 간이 인쇄 방식으로 한글판 『부여분관설명서』를 펴낸 사실이 확인되고,14 이듬해에도 표지 디자인을 달리한 『박물관설명서』를 펴냈다.15,도7 현재로서는 두 안내서의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1960년대에 부여분관이 펴낸 『진열품 약설명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6,도8 그 추정의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1960년대 『진열품 약설명서』의 내용 구성이 1943년에 발간된 『조선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략안내扶餘分館略案內』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이다.도9
곧 창립과 목적, 진열과 관람, 주요 진열품 설명(관내 및 정원 내 석조품) 등의 구성이 그대로 1960년대의 『진열품 약설명서』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유물 설명의 순서도 대체로 비슷한 편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부여분관 시절 펴낸 안내서에 부여를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성지”17 라고 표현한 점을 비롯해서 일제 식민 정부의 왜곡된 관점이 반영된 문안은 삭제되었고, “부여는 남한 일대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인방隣邦 신라는 물론이며 멀리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까지도 문화적 혜택을 받게 하였다”는 문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18

14 국립부여박물관, 『부여박물관의 발자취』, 2009, p.98. 15 국립부여박물관, 위의 책, 2009, p.98. 16 국립부여박물관, 위의 책, 2009, p.114. 17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략안내』, 1943, p.1. 18 국립박물관 부여분관, 『진열품 약설명서』, 1960년대, p.1.
도7. 『부여분관설명서』와 『박물관설명서』
도8. 『진열품 약설명서』
도9. 『조선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략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