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아카이브기행 57
1960년대
박물관 보존과학의 모색
글.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국립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시작

“제3의 불이 켜졌다.”면서 한국의 여러 언론사들은 1962년 3월 19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최대출력 100킬로와트의 원자로가 가동되기 시작한 일을 대서특필했다.01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힘입어 1958년 3월 원자력법이 제정되고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이 설립된 이래 4년여만의 성과였다.02 아직은 낯선 분야였고 걸음마 단계이기는 했지만, 공업, 농업, 의학 분야에서부터 나아가 전기 생산까지 원자력 활용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03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력원 산하의 원자력연구소는 다양한 분야에서 원자력의 효용을 알리고자 했고, 이러한 노력은 금속 문화재의 방사선 투과透過 조사로 이어졌다. 원자력연구소는 국립박물관에 방사선을 활용한 소장품 조사를 제안했고, 국립박물관 김재원 관장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필름 값 등의 제반 비용은 국립박물관을 적극 돕고 있던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이 지원했다. 당시 국립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했던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은 김재원 관장에 대해 “담대하다고 할까, 선구적인 판단을 하였다고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04 국립박물관의 대다수가 낯선 과학자들의 낯선 제안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01 『경향신문』 1962.3.20.자, 3면, “제3의 불이 켜졌다” 02 『조선일보』 1959.4.23.자, 2면, “우리나라 원자력사업” 03 『동아일보』, 1962.4.4.자, 4면, “우리 과학계에 신기원” 04 이난영, 「보존과학의 시작」, 『박물관 창고지기』, 통천문화사, 2005, pp.135-136

국립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1963년 2월 이렇게 처음 시작되었다.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반가사유상(제78호)를 비롯하여 60여 점의 불상과 경주분관의 국보 성덕대왕신종이 그 대상이 되었고 덕수궁미술관의 국보 반가사유상(제83호)도 포함되었다.05 원자력연구소의 함인영咸仁英 박사, 고종건高鍾健 연구관은 국립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감마선 투과 조사를 진행했다.도1 1962년부터 원자력연구소가 가동한 최초의 원자로에서 코발트-60 등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바로 이 코발트-60이 투과성이 강한 감마선을 발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도2
당시의 조사 성과를 국립박물관 학술지 『미술자료』에 실은 원자력연구소 고종건 연구관은 “코발트-60이나 세슘-37 같은 방사성 동위원소는 운반이 용이하고 전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방사선원放射線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06 이어서 그는 이러한 과학적 조사가 제작기법, 제작 연대 추정, 진위 감별, 보수 여부 식별 등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에 기여할 것이며, 종래 시각視覺이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해야 했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전하고 있다.07

05 고종건·함인영, 「방사선투과법에 의한 고미술품의 조사(1)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관하여」, 『미술자료』 8, 1963, pp.1-7.
06 위의 글. 07 위의 글.
도1. 국보 반가사유상 방사선 촬영 장면, 고종건・함인영의 글, 1963에서 옮겨 실음
도2. 국보 반가사유상과 방사선 촬영 사진, 고종건・함인영의 글, 1963에서 옮겨 실음

실제로 고종건 연구관은 감마선 촬영 영상 분석을 통해 국보 반가사유상(제78호)의 불두와 동체가 따로 제작되었으며 내부에 남아 있는 주형에 두 개의 쇠못을 꽂아서 불두와 동체를 고정한 뒤 목둘레를 용접한 다음 표면을 마연하여 완성했다는 분석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도3 또한 기포가 매우 적은 주물로 고도의 주조기술이 활용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08 이처럼 금속문화재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시작되자 국내 언론은 “한국의 고고학도 과학적인 바탕을 갖게 된 셈이다.”라며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을 높이 평가했다.09
이처럼 금속문화재의 방사선 촬영 조사가 외부의 갑작스러운 지원으로 가능했다면,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중앙아시아 문화재 중 석굴사원 벽화의 보존수복은 김재원 관장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10 이 벽화들이 국립박물관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벽화에 대한 보존수복은 결국 그의 퇴임 후 30년 이상이 지난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가능했지만,11 김 관장은 재임기간 내내 미국의 공익재단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일본, 이탈리아, 벨기에의 전문가들과 차례로 교섭하면서 사업의 성사를 도모했다. 그의 이러한 교섭 과정은 1950~1960년대 문화재 관련 국제협력망의 작동 시스템과 내용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주목되며, 그가 그들과 주고받은 여러 편지들 속에 교섭 과정이 담겨 있다.

08 위의 글. 09 『조선일보』, 1963.2.10.자, 7면, “불상 신체검사, 동위원소로 투시사진 촬영” 10 중앙아시아 벽화 복원에 대한 아래의 기술은 대부분, 장상훈 편저, 「김재원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의 박물관 운영과 영문 편지」, 『김재원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 영문 편지』 (국립중앙박물관, 2019) 중 관계 내용을 옮겨 실은 것임을 밝혀 둔다. 11 국립중앙박물관은 2001년 일본 독립행정법인 도쿄문화재연구소와 공동으로 중앙아시아 벽화(투르판 베제클릭 석굴사원 벽화)에 대한 보존처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강형태 외, 「중앙아세아 벽화 보존처리(I)」, 『박물관보존과학』 3, 2001, p.44).
도3. 국보 반가사유상 제작 개념도, 고종건・함인영의 글, 1963에서 옮겨 실음

국립박물관의 중앙아시아 문화재는 국립박물관 설립 직후인 1946년 11월 국립박물관을 방문한 연합군최고사령부 문화재 자문관 리(Sherman Lee)의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1916년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기증한 이 유물들은 원래 일본 교토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문주門主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타림분지 일대를 돌며 가져온 것으로, 오타니가 재정난에 빠지면서 후사노스케의 소유가 되었다.12 리는 이러한 중요 유물들이 수정 전 같은 목조 건물에 보관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인식하고,도4,5 미군정을 통해 내화건물인 국립박물관 본관에 보관하도록 권고했으며, 국립박물관은 이를 즉각 이행했다.13 또한 6·25 전쟁 중에도 1·4 후퇴 후 서울을 재탈환했을 때 벽화들을 부산으로 긴급 소개하여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벽화를 안전하게 보존했다.

12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1986, p.211. 13 국립박물관, 『관보』 제1호, 1947, p.6.
도4. 일제강점기 경복궁 수정전 내의 중앙아시아 벽화 전시 모습 (건판28370)
도5. 일제강점기 경복궁 수정전 내의 중앙아시아 벽화 전시 모습 (건판15943)

이처럼 벽화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김 관장은 1958년 〈한국국보전〉 미국 전시를 위한 출장 중에 보스턴미술관 큐레이터 페인(Robert T. Paine Jr.)과 보존과학실의 영(W. J. Young)에게 벽화 복원 작업 참여 의사를 타진했고 그들의 동의를 얻었다.14 이는 그가 미국 출장길에 오르면서, 미국에서 관련 기술자를 구하겠다는 뜻을 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다음 과제는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아시아재단에 요청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다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이 바로 록펠러재단이었다.15 하지만 록펠러재단도 4개월여의 검토 끝에, 록펠러재단의 지원은 어려우니 다른 기관에 요청할 것을 권고했다.16 벽에 부딪힌 김 관장은 우회로를 모색했다. 직접 벽화를 보존처리할 한국인 전문가를 양성하는 방법이었다. 1960년 김 관장은 록펠러재단의 호의적인 반응을 확인하고, 록펠러재단에 윤무병尹武炳(1924-2010) 학예관을 추천했다.17
그러나 고고학자인 김원용 연구과장이 서울대학교에 신설되는 고고인류학과로 자리를 옮길 것이 정해지면서, 고고학자로 성장해 온 윤무병을 뉴욕대학으로 보내 보존과학자로 키우려던 계획은 지속되지 못했다.18 대신 그를 하버드대학교 포그박물관으로 보내 국제적인 감각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뜻을 록펠러재단 파스(Charles B. Fahs) 인문학부장에게 전했다.도6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벽화를 보존처리할 보존과학자를 양성하려는 계획은 1964년에 재개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일본 도쿄국립문화재연구소에 국립박물관의 정양모 학예관보를 보내 훈련시키는 계획이었다. 일본 측과의 협의를 마친 김 관장은 벽화 자료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아시아재단에 보냈다.19

14 장상훈, 앞의 책, 618쪽, 1958.11.14.자 편지. 15 장상훈, 앞의 책, 618쪽, 1958.11.14.자 편지; 정종현, 「1950년대 아시아재단의 민족문화유산 지원 연구」, 『한국학연구』 52, 2019, pp.143-144. 1958년 8월 27일 김재원 관장은 아시아재단 한국사무소장 제임스(Jack James)와 벽화 복원 사안을 협의하고 이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의견을 확인했다. 16 장상훈, 앞의 책, 2019, 621쪽, 1959.3.17.자 편지. 17 장상훈, 앞의 책, 2019, 622쪽, 1959.9.18.자 편지; 658쪽, 1959.10.2.자 편지; 659쪽, 1960.1.27.자 편지; 660쪽, 1960.2.4.자 편지. 18 장상훈, 앞의 책, 2019, 661쪽, 1960.7.1.자 편지. 19 장상훈, 앞의 책, 2019, 623쪽, 1964.2.18.자 편지.
도6. 김재원 관장이 록펠러재단 파스 인문학부장에게 보낸 편지 부본 (1960.1.27.자)

이번에도 아시아재단은 사업의 타당성에 공감했지만 예산을 먼저 지원하는 데는 주저했다. 대신 아시아재단은 이 사업에 호의적인 유네스코에 지원을 요청해 볼 것을 권고했다.20 실제로 유네스코 측(박물관·사적과)은 지원 가능 여부를 문의한 아시아재단 측에 긍정적인 답을 했지만,21 정작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1964년 당해년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시아재단에 지원을 요청하라는 회신을 김 관장에게 보냈다.22 김 관장은 다시 아시아재단에 지원을 요청했고, 아시아재단은 김 관장이 섭외해 둔 서역 벽화 전문가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 박사를 한국으로 초청해서 벽화의 상태를 점검하도록 지원했다.23 하지만 벽화 복원의 예산을 확보하는 데는 또 다른 시도가 필요했다. 아시아재단 대신 김 관장이 교섭을 시작한 곳은 록펠러 3세 재단이었다. 김 관장은 록펠러 3세 재단의 매크레이(Porter McCray) 상무이사의 방한을 마침내 성사시켰고, 벽화 복원의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24 또한 록펠러재단에 있다가 주일미국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옮긴 파스에게, “박물관을 떠나기 전에 마치고자 하는 것이 서역 벽화 복원”이라고 밝히면서, 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매크레이에게 말을 잘 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20 장상훈, 앞의 책, 2019, 625쪽, 1964.4.17.자 편지. 21 장상훈, 앞의 책, 2019, 627쪽, 1964.4.2.자 편지. 22 장상훈, 앞의 책, 2019, 630쪽, 1964.5.18.자 편지. 23 장상훈, 앞의 책, 2019, 633쪽, 1964.8.12.자 편지. 24 장상훈, 앞의 책, 2019, 639쪽, 1964.10.7.자 편지.

이번에는 외국 전문가를 초빙해 직접 복원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으로 사업 방법이 다시 조정되면서, 이탈리아 복원 전문가 틴토리(Leonetto Tintori)를 초빙하게 되었다. 1965년 봄 방한한 그는 중앙아시아 벽화를 조사한 결과를 매크레이에게 제출하면서, 일본인 전문가대신 인도인 복원 기술자를 추천했다. 하지만 이후 벽화 복원의 담당자로 최종 결정된 사람은 이탈리아의 비날레(Franca Callori di Vignale)였다. 그의 방한은 필라델피아에서 진행 중이던 작업의 마무리 때문에 1967년 가을로 결정되었다.25 그러던 중 피렌체에서 발생한 홍수 때문에 이탈리아에 긴급한 작업이 생겼다는 이유로 그의 방한은 결국 무산되었다.26
실망이 컸지만 김 관장은 또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정년이 채 1년도 남지 않은 1969년 6월 벨기에 중국학고등연구소와 벽화 복원에 대한 교섭을 추진한 것이다. 이번에는 한국의 연수 인력이 벽화 샘플을 가지고 벨기에로 가서 복원 작업과 기술 연수를 동시에 추진하는 방법이었다.27 다만 더 이상의 서신 자료와 관련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정년퇴임과 맞물려 일이 더 이상 추진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중앙아시아 벽화의 복원과 관련해 기울인 일련의 노력은 강한 의지와 끈기, 돌파력 그리고 유연한 전략 구사의 다양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도7

25 장상훈, 앞의 책, 2019, 646쪽, 1966.12.31.자 편지. 26 장상훈, 앞의 책, 2019, 647쪽, 1968.3.1.자 편지. 27 장상훈, 앞의 책, 2019, 648쪽, 1969.6.9.자 편지.
도7. 도4에 보이는 중국 신장 베제클릭석굴 4호 공양보살상 (본관4062)

이처럼 1960년대에는 보존과학자를 양성하거나 보존과학실을 운영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점차 고조되었다. 마침내 1970년대에 접어들어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상수李相洙(1946-1998)와 이오희李午憙가 각각 중화민국 국립고궁박물원과 일본 도쿄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문화재 보존처리 연수를 받게 되었고, 귀국한 이들이 1976년 설치된 보존기술실에서 업무를 개시할 수 있었다.28

28 『박물관신문』 56, 1976.3.1.자, 2면, “학예연구실 기구 개편”; 이난영, 앞의 책, 2005, pp.135-144 및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60년』, 2006, pp.161-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