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아카이브기행 60
1950~60년대
국립박물관의 인재 양성
글.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한국학계를 짊어질 인재 육성의 노력

인사만사. 유능하고 정직하며 이 위에 친절함까지 갖춘 직원을 키워내고, 또 이들의 역량을 적절히 모아낼 수 있다면 어떤 조직이든 조직의 목표를 매우 높은 수준으로 달성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의 역량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은 모든 조직의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광복 후 설립된 국립박물관은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을 대학의 정규 교육 과정에서 제대로 배운 역량 있는 인재를 구하기 어려웠다.
국립박물관은 설립 직후부터 우수한 자질과 높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학예직으로 확보하기는 했지만, 실무 경력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을 보완해 갈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재원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이하 “김 관장”)의 부하 직원으로 근무했던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1990년 김관장의 별세 뒤에 쓴 추모 글에 김 관장이 “내가 사람을 더 많이 양養하지 못했다.” 면서 걱정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회고했다.01

01 이난영, 「박물관의 아버지 김재원 박사」, 『空間』 274, 1990년 6월호;『박물관 창고지기』, 2005, pp.399-402에 재수록.

이처럼 아쉬움 섞인 그의 언급은 인재 양성에 대한 그의 깊은 고민을 보여준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부터 퇴임 2개월 전인 1969년 12월까지 그가 외국의 재단 및 기관과 끊임없이 주고받은 편지들 속에는 인재 양성에 대한 그의 의지와 절실함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그가 염두에 둔 인재 양성은 비단 국립박물관에서 일할 인재뿐만 아니라 장차 한국학계를 짊어질 연구자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인 『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의 저자 이기백(李基白, 1924-2004) 교수는 “(김재원) 선생만큼 학자를 양성하고 키우는 데 노력을 기울인 분도 드물 것이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02

02 이기백, 「여당 김재원 선생을 추도함」, 『空間』 273, 1990년 6월호.; 김재원, 『박물관과 한평생』, 1992, pp.392-395에 재수록.
도1. 1948년 4월 인천항에서 미군 함정 편으로 미국 박물관 연수 길에 오르는 김재원 관장과 김원용 박물감 (여당김재원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도2. 1957년 3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원용 과장을 맞이한 국립박물관 직원들(여당김재원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유럽에서 오랜 기간 유학하면서 국제 감각과 실력을 키웠던 김 관장은 국립박물관과 한국 고고미술사학을 이끌어갈 후학들을 키울 필요성을 절감했고 늘 그럴 기회를 모색했다. 1953년 휴전이 되자마자 김 관장은 김정학金廷鶴 남산분관 관장을 하버드대학교 피바디박물관에 보내서 고고학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했다.03도3
1954년에는 김원용 연구과장을 뉴욕대학교로 유학 보내서 살모니 교수 지도하에 신라토기를 주제로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했다. 학예인력이 몇 명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에게 유학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실로 큰 투자였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데다, 1947년 1년간 캐나다에서 박물관 연수를 경험한 그를 국립박물관과 한국고고학계를 이끌 인물로 키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김원용이 학위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김관장은 록펠러재단과 아시아재단 두 곳에 지원을 요청했고,04 결국 아시아재단으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05
이어서 김 관장은 1957년에 입사한 촉탁 직원 이난영을 미국 유학 대상자로 꼽았다. 김 관장은 1958년 워싱턴대학교의 극동학과 윌리스턴 (Frank G. Williston)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 1~2년간의 유학 기회를 문의했지만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대신 중앙아시아 벽화 복원 분야에 종사할 인력의 양성에 관심을 보인 록펠러재단에 윤무병 학예관을 추천했었지만, 이 일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도4
대신 김 관장은 국제적 감각을 가진 고고학 연구자였던 김원용 연구과장이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로 가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윤무병 학예관의 미국 연수를 추진했다. 그 결과 윤무병은 1962년 4월부터 록펠러재단의 지원으로 1년간, 하버드대학교에서 중국 고대미술사 전공 뢰어 교수(Marx Loehr)의 지도를 받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06 또한 김 관장은 1964년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장녀 김리나金理那를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시켰다.07

03 장상훈 편저, 『김재원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 영문 편지』, 2019, p.652, 1953.8.16.자 편지 및 p.653, 1953.11.10.자 편지 참조. 김정학은 하바드대학교의 모비우스 (H. L. Movius) 교수와 하웰스 (W. W. Howells)
교수를 사사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鶴山 金廷鶴博士 頌壽記念 韓國史學論叢』, 학연문화사, 1999).
04 위의 책, p.654, 1956.2.7.자 편지. 05 위의 책, p.655, 1956.3.14.자 편지. 06 한국고고학회, 『일곱 원로에게 듣는 한국 고고학 60년』, 2008, pp.92-93. 및 위의 책, p.663, 1962.6.27.자 편지와 p.664, 1963.8.13.자 편지. 07 위의 책, p.665, 1964.1.14.자 편지 및 p.668, 1964.10.13.자 편지.
도3. 김정학 고려대학교 교수 겸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장의 미국 유학 관련 편지, 1953년 (여당김재원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도4. 국립박물관 윤무병 학예관의 미국 유학 관련 편지, 1960년 (여당김재원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1964년 아시아재단은 지역 박물관의 육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아시아재단 한국사무소장 스타인버그(David Steinberg)는 지역 박물관의 육성을 통해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앙양하고 한국의 국민 통합과 지역 정서를 고양할 수 있다고 하면서, 김 관장에게 지역 박물관에서 일할 인력의 훈련을 맡아 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국립박물관은 이에 호응했고 아시아재단은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소의 인력이 1년간 국립박물관에서 연수할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했다.08
김 관장은 이러한 상황을 그의 의도를 관철하는 좋은 계기로 삼았던 것 같다. 1965년 초에 배출되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의 첫 졸업생 등 4명이 국립박물관에서 유급으로 1년간(1965.4.~1966.3.) 연수할 수 있도록 아시아재단에 예산을 요청한 것이다. 스타인버그에게 쓴 편지에 보이는 것처럼, 그는 “고고학 분야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인문학에서 가장 취약한 이유는 훈련 받은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서 지원의 필요성을 설득했다.09 또한 김 관장은 박물관 경력직원의 육성에도 힘을 기울여 한병삼 학예사(1961년 입사)를 1966년 교토대학 고고학연구실로 보내 훈련 기회를 주었으며,10 그에 이어서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1회 졸업생으로 국립박물관에서 연수를 했던 손병헌孫秉憲에게도 같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11

08 위의 책, p.669, 1964.10.29.자 편지 및 p.671, 1964.12.4.자 편지. 09 위의 책, p.672, 1965.1.25.자 편지 및 p.680, 1966.12.1.자 편지. 10 위의 책, p.680, 1966.12.1.자 편지. 11 위의 책, p.680, 1966.12.1.자 편지.

1966년에는 장차 한국 미술사학 분야를 이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도 경주되었다. 대상자는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제1회 졸업생이었던 안휘준安輝濬이었다.12 김 관장은 그가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할 수 있도록 영어 학습 비용을 아시아재단에 요청해주었고,13 또한 록펠러 3세 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14 뿐만 아니라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충분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아시아재단에 관련 생활비와 국내 답사여비를 요청해 주기도 했다.15 이로써 김리나와 안휘준 그리고 또 다른 미국인 학생을 대학원생으로 받게 되자 하버드대학교 미술사학과의 로젠필드(John M. Rosenfield) 교수는 “이제 함께 공부하면서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김 관장에게 전했다.16
이어서 김 관장은 구미의 권위 있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할 인물로,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1회 졸업생인 정영화鄭永和를 정했다. 김 관장은 1967년 7월 샹바르(Roger Chambard) 주한 프랑스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서, 프랑스에서 구석기 고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선해달라는 요청을 했다.17 그는 정영화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마침내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확보한 김 관장은 1965년의 프랑스 여행 시에 만났던 프랑스 보르도 대학의 보르드(Francois Bordes) 교수에게 정영화를 학생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18 훗날 김 관장은 한 회고록에, 학위를 취득하고 구석기 고고학 전문가로 성장한 정영화가 “전곡리에서 구석기 문화를 찾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19

12 안휘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김재원 관장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그가 한국회화사를 전공한 것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한국회화사 분야를 걱정한 김 관장의 강한 권유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여당기념사업회, 『박물관의 초석을 놓다』, 2017, pp.235-236). 13 위의 책, p.678, 1966.11.18.자 편지 및 p.679, 1966.11.21.자 편지. 14 위의 책, p.687, 1967.3.25.자 편지 및 p.688, 1967.3.28.자 편지. 안휘준은 미국 유학 당시 대학원 등록금뿐만 아니라 3개월간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JDR 3세 재단의 장학금 덕분이었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앞의 책, 2017, pp.236-237). 15 앞의 책, p.687, 1967.3.25.자 편지; p.689, 1967.3.30.자 편지; p.692, 1967.4.3.자 편지. 16 위의 책, p.687, 1967.3.25.자 편지 및 p.688, 1967.3.28.자 편지. 안휘준은 미국 유학 당시 대학원 등록금뿐만 아니라 3개월간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JDR 3세 재단의 장학금 덕분이었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앞의 책, 2017, pp.236-237). 17 고고학의 여러 분야 중 구석기시대를 선택한 것은 1960년대에 방한해서 한국의 구석기 유적을 조사하려는 미국인 학자 모어 (Albert Mohr) 의 계획을 김재원 관장이 무산시킨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관장은 일본고고학자의 전유물이 된 한국의 유적을 외국인에게 맡길 수 없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김재원, 「한 학술원 회원의 수기」, 『나의 걸어온 길 – 학술원 원로회원 회고록』, 대한민국학술원, 1983; 『박물관 한평생』, 1992, p.342 참조). 18 위 앞의 책, p.717, 1968.4.13.자 편지 및 p.723, 1968.7.23.자 편지. 2009년 4월, 정영화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유학 기회를 마련해 준 김재원 관장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1972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한 소식을 김 관장에게 제일 먼저 알려 축하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김 관장은 록펠러재단에 의뢰해 귀국길에 오른 그가 3개월간 영국박물관 등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앞의 책, 2017, pp.169-170). 19 김재원, 『박물관 한평생』, 1992, 탐구당, p.344.

한편 김 관장은 국립박물관의 숙원 사업인 소장품 정리 사업을 이끌 인물로 이난영 학예관보를 정하고, 사업 수행에 필요한 역량을 키울 훈련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김 관장은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이 운영하는 1년간의 박물관학 연수 과정 이수에 필요한 유학비용과 일본어 학습 비용을 아시아재단으로부터 확보함으로써, 그를 박물관 소장품 관리 전문가로 육성하는 데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20
한편 1967년 8월 그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김 관장은 유네스코와 록펠러 3세 재단의 후원으로 미국 하와이대학교 동서문화센터 기술교류연구소와 호놀룰루미술관이 함께 운영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 박물관 연수프로그램”에 대해 주목했다. 김 관장은 그가 일본 연수를 마치는 대로 다시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도록 했다. 호놀룰루미술관 관장직에서 은퇴한 그리핑 (Robert P. Griffing Jr., 1914-1979)은 직접 일본에 가서 그의 영어 소통 능력을 점검해주기도 했다.21도5,6
이 학예관보는 1968년 9월부터 1969년 4월까지 7개월간 연수를 받으면서, 소장품 관리, 전시, 교육, 보존과학 등 기본 분야를 비롯해서, 박물관 조직과 이사회, 건축, 박물관 회원 제도, 자원봉사자, 보험과 운송, 박물관법, 뮤지엄숍 등 미국 박물관계의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접하고 돌아왔다. 그는 이 연수 때의 학습 내용을 바탕으로, 국립박물관의 실제 운영을 통해서, 또한 대학 강의를 통해 한국 박물관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22

20 앞의 책, p.680, 1966.12.1.자 편지; p.682, 1966.12.28.자 편지; p.690, 1967.3.31.자 편지. 이난영, 『박물관 창고지기』, 통천출판사, 2005, pp.58-62. 21 위의 책, p.716, 1968.4.8.자 편지 및 p.719, 1968.4.29.자 편지. 22 이난영, 2005, pp.62-80. 한국의 첫 박물관학 전공자이자 또한 미술사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이난영은 『박물관학입문』(삼화출판사, 1973), 『박물관학』(삼화출판사, 2008) 등 박물관학 개론서를 집필해서 한국 박물관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도5. 1968~1969년에 미국 호놀룰루미술관에서 연수를 받은 국립박물관 이난영 학예관보의 활동 모습 (이난영, 『박물관 창고지기』, 2005, 통천출판사, p.120에서 옮겨 실음)
도6. 1968~1969년에 미국 호놀룰루미술관에서 연수를 받은 이난영 학예관보와 동료 연수생 및 호놀룰루미술관 직원들(이난영, 『박물관 창고지기』, 2005, 통천출판사, p.121에서 옮겨 실음)
* 이 글은 장상훈, 「김재원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의 박물관 운영과 영문 편지」, 『김재원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 영문 편지』, 국립중앙박물관, 2019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 1945년 설립 시점부터 1960년대까지 초창기 국립박물관의 발자취를 더듬어본 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을 마치면서,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면을 허락해주신 『박물관신문』 편집위원회와, 거친 원고를 깔끔하게 편집해주신 기제도, 김미화, 명성은, 서인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지난 5년간의 연재 기사가 국립박물관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 모으고, 나아가 국립박물관의 역사적·사회적 역할과 기여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